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9.15 21:39 수정 : 2009.09.15 21:39

최우성 경제부문 금융팀장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선 영화 관객이나 티브이 시청자들도 엄연히 작품 창작에 기여했으니 그들로부터 관람료(시청료)를 받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금액만큼을 소득(보수)으로 돌려줘야 한다.” 한 천재 감독의 요설처럼 비칠지는 모르나, 그의 말 속엔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한 방’이 담겨 있다.

오늘날 한 사회가 만들어낸 물질적 가치는 그야말로 ‘사회적’ 생산물이며, 따라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최종 생산물이 만들어지기까지 각 구성원이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정확하게 가려내기란 힘들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이른바 ‘집단지성’의 산물이자 ‘소통’의 결과물이란 뜻일 게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정이란 털털거리는 작업대 앞에 말없이 쪼그려 앉은 채 옆 사람이 반쯤 조립하다 옮겨준 트랜지스터 라디오 틀에 전선을 이리저리 연결하기만 하던 오래전의 음울한 공장 풍경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탓이다. 시청자의 번뜩이는 댓글 한 줄이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이고, 불만덩이 직원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회사의 운명을 가를 히트상품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만일 고다르의 주장을 경제 영역의 낯익은 언어로 옮겨보면, 아마도 그 알맹이는 한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의 총합이란 흔히 ‘취업자’라 불리는 한 무리의 경제활동인구가 담당했던 몫의 단순합 그 이상이란 의미가 아닐까 싶다. 현대사회의 생산함수란 자본과 노동, 기술의 단순조합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복잡한 ‘4차원 회로’인 까닭이다. 통상 국내총생산(GDP)이란 이름으로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물의 총합을 계산해내고, 그 크기를 서로 견줘보는 작업이 분명한 한계를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마침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낯익은 국내총생산 지표 대신 경제발전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만들 것이라며, 그 지표에는 행복이나 웰빙처럼 물질적 형태로 잘 드러나지 않는 항목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 작업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아마르티아 센 등 ‘삐딱한’ 주류 경제학자이면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저명한 연구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얼마 전 우리 정부가 뜬금없이 연말까지 우리 실정에 맞는 ‘경제행복지수’를 만들겠노라고 선언하고 나선 것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는 않다.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특히나 종종 가치보다는 밥만이 중요하다고 떠들던 ‘우파’(?)의 변신은 북돋워주고 칭찬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국내총생산을 예컨대 ‘국민총행복’(GNH)과 같은 잣대로 바꿔치기하는 것만으로는 겨우 반 발짝만 앞으로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만들어낸 가치의 총합이 진정으로 ‘사회적’ 생산물임을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건 그 열매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되돌아가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다. 예부터 전해져온 공동체의 지식과 전통이 보탬이 됐다면 그 혜택이 소수의 손에 독점되지 않도록 공공성의 이름으로 지켜내야 하고, 실업자, 주부, 학생, 군인, 노인 그리고 ‘백수’ 등 엄연한 사회 구성인이면서도 국내총생산을 계산하는 기존의 문법상 ‘일하지 않는 자’에게도 응당 그들의 몫을 챙겨주는 제도를 서둘러 만들어내야 한다. 아찔한 속도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 ‘고다르 경제학’을 더욱 급진화시켜야 하는 이유다. 결국 우리 사회의 행복 수준도 높일 수 있는 길임은 물론이고. 최우성 경제부문 금융팀장morge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프리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