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03 21:50
수정 : 2009.09.0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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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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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테도 신라 해상왕 장보고가 있었는데….’
입에서 넋두리처럼 나온 혼잣말은 부질없었다. 1000~500년 전 일본에 밀려온 중국의 진귀한 책과 불경, 그림, 불상, 공예품들이 박물관을 한가득 메운 풍경 앞에서는. 중근세기 중국과 일본의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곧 성심과 신의를 다하여 교역하고 지식과 인정을 나눈 중-일 교류사의 흐름이 장강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중국과 일본의 상인, 승려, 사신들이 수백년간 주고받은 상품과 불경, 불상, 공예품 따위의 유물들은 상상 이상으로 화려하고 깊었다. 숱한 풍랑과 전란을 딛고 바다를 건너온 이 많은 유물들이 놀랍도록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정권 교체의 격변을 낳은 8·30 일본 총선 바로 전날 일본의 ‘경주’라는 나라시의 국립나라박물관 전시실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돌아다녔다. 예로부터 고려와 일본과의 최대 무역항이던 중국 상하이 남쪽 저장성의 무역항 닝보(영파)를 무대로 펼쳐진 일본과의 불교 교류사 유물들을 집대성한 특별전 ‘성지 영파’전이 막 끝물에 접어든 참이었다. ‘일본 불교 1300년의 원류-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찾아왔다’는 부제가 달린 전시는 8세기 중국 당대부터 송, 원대를 거쳐 16세기 명대까지 일본과 오갔던 주요 불교 예술품과 불교 서적, 교역품들로 빼곡히 메워졌다.
닝보는 불교 역사에서 심오한 위상을 누렸던 곳이다. 부근의 천태산과 보타산, 연경사·천동사 등의 명찰들은 천태종과 선종, 관음신앙의 성지였다. 깨달음에 목마른 고려와 일본의 스님들이 여기에 몰려들어 수학하고, 불경과 불상을 얻어 갔다. 진열창에서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닝보의 불교 문화에 열광했는지를 실증하는 다채로운 유물들과 만났다.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송나라 불경 ‘일절경’, 그 일절경을 40여년간 베껴 적은 노승의 떨리는 육필, 블루톤의 선명한 채색 속에 수행자들의 신비스런 일상을 쟁여 넣고 법력으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오백나한도> 90여폭의 자태가 발길을 붙잡았다. 전시장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14세기 전남 신안 해저 침몰선의 매끈한 상품 청자류와 물품표 목간 유물 등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고려나 신라는 주역이 아니었다. 이들 유물 또한 14세기 닝보에서 출항해 일본 하카타와 교토의 도후쿠사(동복사) 등으로 가던 중국-일본 교역품들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에겐 교류사를 드러내는 유물들이 빈약한 것일까.
닝보의 교류사는 우리 역사와 겹친다. 9세기 해상왕 장보고는 흑산도를 거쳐 닝보와 항저우(항주) 등에 이르는 무역 항로를 개척했다. 일본인들은 신라인들이 개척한 항로에 의존해 닝보와 교역을 시작했다. 고려기행기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람 서긍은 닝보에서 흑산도를 거쳐 고려로 갔고, 대각국사 의천, 의통 등의 고려 큰스님들 또한 여기서 유학했다. 시내 중심가에는 고려 상인, 사절들의 근거지인 고려사관(2006년 복원)이 번영했다. 그 막대한 문헌 기록들은 지금 실체가 거의 없다. 신안선 유물만 해도 동북아 문화교류사가 함축된 ‘타임캡슐’이지만, 수십년 동안 제대로 된 종합 기획전 하나 못했고, 연구 논고도 드물다. 소장 기관들 사이의 관할 다툼으로 유물들이 분산되어 묻힌 탓이다. 불교의 연기설에서 말하듯 우리의 현재는 과거가 축적된 결과이며, 현재는 곧 우리 미래를 규정한다. 성심으로 교류사의 자취를 간직하고 그 의미를 끈질기게 복기하려는 섬나라 사람들의 숯불 같은 관심은 이 특별전이 던져준 가장 통렬한 화두였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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