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5 20:10
수정 : 2009.08.25 20:10
|
김경애 사람팀장
|
한겨레프리즘
그의 ‘유고’ 소식을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 등굣길 시내버스 안에서였다. 그러고 보니 어언 30년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자 아나운서의 유난히 엄숙한 목소리도 낯설었고, ‘유고’란 애매한 표현도 생소했다. 죽었다는 것인가, 아프다는 것인가? 그 순간 이후 내내 무겁게 가라앉은 승객들의 침묵도 의아스러웠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몇몇 친구들이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내 또래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때까지 대통령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던 까닭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아, 대통령도 죽는구나!”
1979년 11월3일, 박정희의 국상이 내가 본 첫번째 대통령의 장례식이었다. ‘10·26 사태’ 이후 9일 내내 장엄한 진혼곡만 틀어주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온통 국화꽃으로 치장된 영구차에 실려 가는 그의 마지막 길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통곡 속에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군중들의 눈빛에서는 슬픔만이 아니라 뭔가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18년 장기 독재자의 비극적 말로’는 이후 80년대 우리 386 세대들의 젊은 날을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게 한 불길한 서곡이었다.
대통령의 장례식, 두번째였던 2006년 최규하의 국민장은 솔직히 별 감흥이 남아 있지 않다. 영결식 날이 하필이면 27년 전 박정희의 유고로 그가 대통령 권한을 넘겨받은 날짜와 같은 ‘10월26일’이었다는 점이 이채로웠을 뿐. 자신을 역대 최단명 ‘8개월짜리 대통령’으로 물러나게 한 ‘12·12 쿠데타의 진상을 끝내 밝히지 않은 채 가버린 그의 죽음은 애도보다는 아쉬움을 더 많이 남겼다.
그리고 2009년 여름, 석 달 사이에 잇달아 두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렀다. 슬픔에는 선행학습 효과나 면역력이 전혀 먹히지 않는 듯, ‘김대중 할아버지’의 영면은 살아서 마땅히 상주 노릇을 했어야 할 ‘노무현 아저씨’의 허망한 부재를 한층 더 실감나게 했다.
하지만 서울광장에서 열린 두 대통령의 추모문화제를 지켜보면서 두 죽음을 보내는 마음의 다름도 또렷해졌다.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차리고 지키며 몇날 며칠 지치도록 울고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토론을 하던 사람들. ‘노무현의 국민장’은 국민의 손으로 치른 ‘비극의 향연’과도 같았지만 그의 죽음은 ‘정치적 타살 논란’ 속에 역사의 숙제가 됐다. 경찰의 저지로 무대조차 만들지 못한 채 트럭 위에서 불러야 했던 그를 위한 추모곡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는 회한으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불과 100년 남짓한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파란 없이 천수를 누린 정치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제쳐두고라도 여운형, 김구, 조봉암, 장준하 선생에 이르는 민족 진영 인물들은 암살, 사형, 의문사 등으로 비명에 갔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나라 밖으로 쫓겨나 쓸쓸한 죽음을 맞았고, 두번째 대통령 윤보선도 ‘5·16 쿠데타’로 물러난 뒤 가족장으로 퇴장했다.
살아생전 다섯 번씩이나 타살의 위협을 당했지만 끝내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고 무사히 임기를 마친 뒤 전세계로부터 존경 어린 애도까지 받으며 자연사한 첫번째 한국 대통령, 반세기 동지이자 동반자로 해로한 부인과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의 인사를 받으며 떠난 행복한 인간, 김대중. 그를 위한 추모공연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송가’를 함께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