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04 21:38
수정 : 2009.08.0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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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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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헌납 1968년 4월’
비장한 충무공 동상 뒤편에 이런 명판이 붙어 있었다. 패장처럼 오른손에 칼집을 든 충무공 동상 바로 아래서 육중한 충무공의 아랫도리를 훔쳐본다. 생전 처음 보는 동상의 비경(?) 앞에 주위에서 카메라가 터진다. 확실히 시민들은 들떠 있었다.
지난 1일 세종로 한복판에 개방된 서울 광화문광장은 폭이 40m도 안 됐지만, 사람들은 수백년간 들어갈 엄두도 못 냈던 이 섬 같은 공간을 한껏 걸어다녔다. 분수쇼 펼쳐지는 동상 앞을 첨벙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로 북쪽을 본다. 여인의 허리처럼 부드러운 북악산의 산줄기가 축선을 이루어 경복궁, 광화문의 닫집을 타고 내려와 광장으로 뻗쳐오는 환각이 눈을 휘감았다. 정작, 동상 뒤 지하 해치광장 들머리에서 남쪽을 보니 칼 찬 이순신 동상은 엉거주춤한 돈키호테의 모습을 닮았다. 애니콜 광고판이 붙어 있는 광화문 네거리 빌딩과 그 뒤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스포츠서울> 사옥 앞에서 팔뚝과 손이 ‘주먹대장’처럼 기형적으로 커진 동상의 뒷모습이 골목대장처럼 부각된다. 다시 다가간 동상 앞을 경찰관들이 “여기 올라가길 좋아하는 불온한 사람들이 있다”며 막아섰다. 이런 썰렁한 풍경이 섞이고, 바로 옆에서 배기가스 내뿜는 정체 차량들로 숨이 막혔지만 광화문 대로를 걷는다는 기쁨을 누르진 못했다.
광화문은 시민 광장과 인연이 참으로 멀었다. 이순신 동상과 정부중앙청사, 세종문화회관, 문화부 청사 등으로 특징되는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경관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0~70년대 조성된 관제 도시개발의 산물이다. 광화문 앞은 조선왕조가 의정부와 육조 관아를 차려 육조거리를 만들었을 때 함부로 통행하지 못하는 권력의 영역이었다. 일제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태평로를 이어 나라 최고의 큰길이 됐지만, 정점의 광화문은 회한의 대상이었다.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근대 물산 박람회 때 거적에 싸인 문은 주검 같은 몰골로 전락했고, 총독부 청사 신축으로 뜯겨 나가는 처참한 후일담을 밟게 되었다. 외면하고 싶은 봉건 왕조의 잔재 앞 대로를 반길 턱이 없었다. 4월 혁명 뒤 광화문은 치열한 시민 저항의 전장이 되었다. 1990년대까지 역대 정권이 대로 양옆에 권위적 관가를 만들면서도 광장을 철저히 외면했던 데는 이런 역사적 뿌리가 있었다.
시민들의 소통과 상업의 마당으로 쓰이는 근대 광장의 개념은 서구 르네상스 도시국가들에서 파생된 근대의 수입품이다. 전제 권력이 오래 건재했던 전통 동아시아에서는 근대기 이래 권력자들이 민족주의와 권력 과시를 위해 하사한 광장들이 많다. 하지만 광화문 길과 세종로는 관제 광장의 시혜에서도 제외된 채 4월 혁명과 6월 항쟁의 대결을 거쳐 2002년 월드컵 응원과 이후 촛불집회의 열광 속에 시민들의 삶터로 자리를 포개고 들어올 수 있었다. 광화문광장은 그 뒤늦은 만남을 몸으로 느끼고 체화하는 계기였다.
개장하자마자 광장의 시위 허용 여부를 놓고 논란이다. 이 공방을 떠나 광장의 속성상 광장은 절대 당국의 의도인 역사·문화·휴식 공간으로만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규격화하지 않은 삶이 오가고 교감하는 광장은 필연적으로 불온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이 건설한 광장이 권력의 용도에 끝까지 충실했던 경우는 없었다. 루이 15세 광장이던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이 혁명과 공포정치의 무대가 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광장이 러시아 대혁명의 온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기억한다. 광화문광장 또한 부정과 불온의 역설을 밟게 될 것이다. 광장을 다시 찻길로 만들지 않는 한.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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