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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19 22:14 수정 : 2009.05.19 22:14

김경애 사람팀장

한겨레프리즘

그를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사뭇 달라 보였다. 1989년 3월 늦봄 문익환 목사의 평양길에 동행한 ‘의문의 재일동포’로 언론에 등장한 이후 사진으로만 봐온 그의 모습은 조금은 각이 진 턱선 탓인지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늦여름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흰색 반소매 러닝셔츠 차림으로 고국의 손님을 맞는 그는 그저 우리네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눈썹과 턱수염까지 성성해진 백발과 반점 하나 없이 맑은 얼굴빛이 온화한 느낌을 더해주는 듯했다.

그가 바로 ‘길을 찾아서’의 네 번째 이야기,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의 주인공 정경모 선생이다. 애써 바다 건너 직접 집까지 찾아와 청탁하는 정성이 가상했을까, 그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회고록 집필을 약속했다. 다만, 팔순 중반을 넘어선 체력과 흐릿해진 기억력이 자신이 없으니, 초고나마 전편을 마무리한 뒤 차분히 연재를 시작해줄 것을 주문했다. 때문에 언제부터 어떻게 얼마나 쓸 것인지는 전적으로 필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짧은 방문을 마쳤다.

해가 바뀌어 새로 맞은 봄, 늦봄의 방북 20돌을 기념해 4월부터 연재를 시작하고픈 욕심에 원고 독촉 전화를 해봤다. 예상대로 그는 선뜻 내켜하지 않았다. “옛일을 되살리는 게 그리 만만치가 않소이다.”

하지만 <한겨레> 창간 21돌을 축하해 달라는 ‘핑계’로 설득한 끝에, 지난 15일부터 그의 ‘기구한 40년 망명기’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첫 장부터 놀라움의 연속이다. 흐릿하다는 기억력이 무색하게도, 그의 글은 사료나 역사 논문을 보는 듯 생생하고 정확하고 풍부하다.

이제 겨우 10회 남짓 나갔지만, 독자들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그의 이름조차 생소한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며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다.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사이에서 ‘근현대사 인식을 위한 필독 금서’였던 <찢겨진 산하>의 해적판으로 그의 이력과 필력을 기억하는 중년 세대들은 ‘그때 그 시절’의 충격과 감회를 떠올리게 한다며 역시나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절판된 그의 책을 구하고 싶다는 요청도 심심찮다.

가장 적극적인 독자층은 그와 비슷한 연배의 노년층인 듯싶다. 부러 전화를 걸어 “재미있다”는 인사를 전해주는 이들도 있고, 이것저것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을 확인해 달라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그런 한편에서는 달갑지 않아 하는 반응도 민감하다. ‘국가보안법 기소중지’라는 그의 사법적 신분을 환기시키며 글을 싣는 경위를 캐묻고, 계속 지켜보겠다는 ‘노골적 경고’까지 전해온다. 늦봄과 그의 방북 직후 몰아친 ‘공안 탄압 열풍’ 속에 구속됐던 당시 이재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은 ‘이명박 정권 탄생의 산파이자 실세’가 됐다. 그때 평양에서 그와 함께 김일성 주석 면담을 했던 ‘통일운동지기’ 황석영씨는 “이명박 정부를 돕겠다”고 나서 ‘변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런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그를 ‘재일 통일운동가’라는 희귀한 명함으로 살아오게 했고, 이른바 민주화 이후 20년이 넘도록 발길을 막고 있는 ‘공안의 벽’은 요지부동인 것이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정경모 선생의 삶을 함께 되짚어보는 뜻은 무엇일까? 실향민 출신의 한 기독교계 원로가 들려준 ‘독후감’ 속에 그 답이 있었다. “나도 분명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는데 어쩌면 이렇게 우리 역사의 진실을 모르고 있을까요?”

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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