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국제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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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그날 에프티에이(FTA)가 상임위까지는 통과되는 걸로 내가 박진이한테 물어보니까 3당 간사 사이에서는 합의가 됐다고 그랬거든요 … 그런데 계속 주변에 강기갑이가 서 있단 말이에요 ….” 보다 못한 한 기자가 ‘강기갑 의원’이라고 고쳐줬다. 비로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의원님’이라고 말하며, “우리끼리 뭐 …”라고 얼버무렸다. 동행한 외교부 관리는 “여기 녹음 안 하지”라고 물었다. 지난 27일 외교부 기자실을 찾은 유 장관이 벌인 장면이다. 그는 이날 국회에서 저지른 막말과 무례에 대해 공개적인 유감과 사과를 표하러 왔다. 그는 보도된 것처럼 지난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처리를 위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에서 천정배 의원을 보고 “여기 왜 들어왔어, 미친놈” “저게 …”라고 말했다. 비준 동의안 상정을 놓고 의원들의 소란이 계속되자 “이거 기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해”라고 국회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그는 혼잣말이었다고 해명했다. 자리에 없으면 나랏님에게도 욕을 한다. 공개된 것이 재수 없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유감과 사과를 표명하는 공식 석상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행태를 보이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보고 ‘박진이가’라고, 강기갑 민노당 대표를 놓고 ‘강기갑이가’라고 말하다가, 기자로부터 무안을 당하는 외교부 장관이라니. 유 장관의 막말 소동은 근본적으로 자질 부족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와 외교부는 그동안 자질을 의심케 하는 일들을 벌여왔다. 그는 3월21일 기자들에게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비확산 문제가 부각되니 피에스아이 참여 문제를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혀,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를 놓고 그 후 한 달 동안 계속된 혼란의 문을 열었다. 외교부는 국방부보다도 더 강경하게 피에스아이 참여를 밀어붙이다가,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유보시켰다. 이 와중에서 그와 외교부는 피에스아이 참여는 북한 미사일 발사와 관련 없다고 논리를 바꿔, 도대체 왜 피에스아이 문제를 꺼냈는지 알 수 없게 하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했다. 장관 취임 이후 첫 다자외교 무대였던 지난해 7월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는 의장성명을 바꿔 달라고 애걸하는 망신도 벌였다. ‘금강산 피격사건’과 관련한 문구를 의장성명에 넣는 데 골몰하다가, “10·4 남북 정상선언에 기초한 남북 대화”라는 문구도 들어가자, 기겁을 하고 벌인 일이다. 남북 문제를 국제외교 무대에 무리하게 가져갔다가 당한 망신이다.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완전히 실패한 것(외교)이라는 지적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배짱을 내밀었다. 광우병 파동을 일으킨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방중 도중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한-미-일 군사동맹 비난 파문, 이 대통령 방일 직후 일본 사회교과서에서 독도의 일본 영토 표기 소식, 미국 쪽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방한 연기 일방적 발표 등 이명박 정부 이후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게 외교적 실책이 벌어졌다. 유 장관의 국회 막말 사건과 피에스아이 소동은 이들이 외교협상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사와 행태마저도 ‘비외교적’임을 드러냈다. 그는 막말을 사과하는 자리에서, 국회에서의 몸싸움이 “뉴스에 나가면 국가 브랜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며 “창피하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유 장관 등 외교관들이다. 나는 그런 외교관들이 더 창피하다. 정의길 국제부문 선임기자Egil@hani.co.kr[관련 영상] 유명환 장관 ‘천정배 의원 비하’ 발언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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