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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8 22:37 수정 : 2009.04.28 22:37

김경애 사람팀장

한겨레프리즘

지난주, 조금은 특별한 영화 시사회가 있었다. 시사회 찾아다니는 것이 ‘업’인 영화 담당 기자들이 아니라, 일반 기자들을 초대한 자리였다. 기자, 그중에서도 ‘사양 산업’ ‘3D 직업’으로 동정 아닌 동정을 받고 있는 신문기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기에 기꺼이 달려갔다.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2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흥미진진했다. 촉망받는 젊은 하원의원과 부적절한 관계였던 여성 보좌관의 죽음을 둘러싼 연애 스캔들로 시작된 사건은 점차 테러와의 전쟁 와중에서 막대한 이권을 챙기려는 용병업체의 거대한 음모를 드러낸다. 주인공(러셀 크로)은 절친한 친구인 그 하원의원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살해 위협까지 무릅쓰며 치열하게 음모를 파헤쳐 나간다. 하지만 ‘세상이 발칵 뒤집힐’ 1면 특종을 싣고자 몇 시간째 윤전기를 잡아둔 마지막 순간, 그는 사건의 실체가 ‘음모’가 아니라 ‘돌발 사고’였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끝내 우정 대신 진실을 선택한다.

너저분한 편집국 풍경, 경영 논리에 휘둘리는 편집권, 시간과 특종 압박에 쫓겨 사생활을 잊고 사는 기자들의 일상 등등, 영화는 몰래 카메라에 찍힌 우리 모습을 본 듯 내내 사라지지 않는 잔상과 생각거리들을 남겼다.

내가 만약 러셀 크로처럼 친밀한 취재원의 사건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 생각의 끝에서 ‘불가원 불가근’(不可遠 不可近)이라는 말을 다시 발견했다.

‘불가원 불가근’. 기자에게 이 말은 권력과의 관계, 취재원과의 관계는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는 뜻이다. 수많은 선배들에게 때로는 말로, 행동으로 배워온 비판정신, 기자의 불문율이다.

그러면 과연 선배들의 뜻을 제대로 이어왔을까? “그렇다”는 팻말을 자신 있게 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그 경계선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중의 하나, 취재원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취재 협조를 위한 ‘사탕용’이 아닌 ‘진심을 담아’ 건넨 그 꽃다발의 주인은 바로 엄기영 앵커였다. 그가 1996년 11월8일로, 7년간의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를 안팎에서 두루 박수를 받으며 물러났을 때였다. 하지만 축하나 위로의 꽃다발은 아니었다. 끝까지 소신을 지켜 내가 썼던 기사가 ‘오보’가 되지 않도록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뜻이었다.

그 1년 전, ‘엄기영은 왜 안 떠났나?’(<한겨레 21> 1995년 10월12일치)란 제목으로 나간 짧은 인터뷰 기사였다. 이듬해 4·15총선을 6개월 앞둔 당시 경쟁사의 간판급 뉴스 진행자들이 줄줄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속에서 ‘최고 인기’인 그가 홀로 마이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들어본 것이었다. “끝까지 기자로 남고 싶다. 기본적으로 언론과 정치는 갈등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후 지금껏 한 번도 공적, 사적으로 그를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복귀한 그가 2008년초 13년3개월의 최장수 앵커 기록을 세우고 퇴장했을 때도, 곧이어 <문화방송> 사장으로 화려하게 재입장했을 때도 내심 박수를 보냈다.

그런 그가 최근 ‘피디수첩’ 수사 사태, 신경민 앵커 교체 파문 등 정권의 직·간접적인 부당한 외압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있다는 질타를 받고 있다.

엊그제 ‘사장 해임안’을 자진철회한 이사진은 “공영방송을 지켜 내겠다”는 그의 다짐을 믿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가 다시 한 번 ‘약속’을 지켜내 주길 바라는 뜻에서 마음의 꽃다발을 보낸다면, ‘불가원 불가근’의 불문율을 어기는 셈일까?

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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