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17 21:25
수정 : 2009.03.1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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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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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법은 순리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뤄진 글자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치를 담고 있어 모두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벗어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때 한 일은 대법원의 진상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상식을 벗어난 행위다. ‘시국이 어수선할 수 있으니 피고인에 대한 보석을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하고, 집시법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 심판 제청이 있었음에도 촛불 사건 재판을 계속하라고 요구하고, 촛불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기식 배당을 한 것 등은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들에게 법, 곧 순리를 거스를 것을 요구한 일이다.
법은 사회적 갈등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푸는 구실을 해야 한다.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해소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 나라의 헌법은 표현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 갈등 해결을 위한 물꼬인 셈이다.
촛불집회는 그런 헌법상의 권리에 따른 행동이다. 하지만, 신 대법관의 행동은 갈등 해결을 위한 물꼬를 틀어막은 행동이다. 물은 가둬두면 잠시 흐르지 않는 듯하지만 점점 차올라 벽을 넘거나 벽 자체를 부수기도 한다.
이처럼 갈등은 억누르면 언젠가는 폭발한다.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진다. 신 대법관의 ‘노력’이 ‘어수선한 시국’을 잠시 평온해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토론문화를 해치고 갈등의 조정과 해결을 막아 시국을 정말로 어수선하게 만들 수 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이 이를 생생히 증언해 주지 않는가. 당시 정권은 ‘어수선한 시국’을 바로잡고자 여러 경로를 통해 법원과 검찰에 ‘엄격한’ 법집행을 강요했고, 이에 동조한 판사나 검사들이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철창 안에 가뒀지만 그들의 ‘충정’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법원이 사회적 갈등의 합리적 해결을 위해 조정자 구실을 해야 하는 때다. 법원의 독립을 보장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 정부가 법치를 외치면서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언로를 통제하려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순리인 법을 지켜야 할 법원장이 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을 했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정의롭다’는 말을 즐겨 쓴다. 정의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름은 흑백이 아니다. 바를 정(正)은 하나(一)에 이름(止)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름을 뜻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는 날선 칼을 들이대고 지난 정권의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검찰은 서민들의 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힘센 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 공직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점, 기업 운영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 등의 이유로 정치인과 경제인에 대해 솜방망이 구형을 했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 힘이 없는 이들은 붙잡지만 힘센 자는 찢고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이 그짝이다. 법이 그물이 되어 힘센 자는 꽁꽁 묶고 작고 힘없는 이들은 성긴 구멍으로 빠져나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법은 그물보다는 거미줄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법원 앞에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의 손에 든 저울이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또 검찰에는 ‘정의롭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계기로 법이 순리를 회복해 정의로워지기를 바란다. 신 대법관부터 순리를 따르라.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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