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03 18:47
수정 : 2009.03.0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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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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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소크라테스 애제자였던 크세노폰은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에 관심이 많았다. 모험심이 동한 크세노폰은 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제국 내전에 참여했다. 형의 왕좌를 노린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인 용병 1만명을 앞세우고 제국 내부 깊숙이 진격했다. 크세노폰은 비전투 참모로 그 용병부대에 끼어 있었다. 바빌론 인근 쿠낙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성급한 키루스는 습격전을 벌이다 전사하고 말았다. 1만명의 그리스군, 곧 만인대는 한순간에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 심장부에 갇힌 꼴이 됐다. 더 나쁜 일이 뒤를 이었다. 만인대를 이끌던 장군과 부관들이 페르시아와 담판을 지으러 갔다 모조리 살해당했다. 지도부를 잃은 진중은 고립감과 두려움으로 떨었다. 밤이 되자 폐소공포증은 더욱 커졌다. 크세노폰이 나선 건 그때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크세노폰은 병사들 앞에 섰다. 그는 그리스인의 자존감과 독립심에 호소했다. 그들이 자유인이고 자유국가의 시민이며 자유로운 조상의 후예임을 상기시켰다. 크세노폰의 열정이 병사들을 감염시켰다.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자유를 헌납하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숙영지를 휘감았던 불안과 공포를 밀어냈다. 병사들은 이 비전투 참모를 사령관으로 세웠다. 크세노폰은 귀족이었고 귀족적 가치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민주주의 원리가 발동했다. 모든 것을 민주주의 요구에 맞추었다. 위기 상황마다 집회를 열고 사태를 설명하고 토론을 벌였다. “더 나은 방안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발언하시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의 안전이오.” 토론이 끝나면 표결에 부치고 다수결로 결정했다. 1만명이 모두 병사이자 장군이었다. 길잡이도 없고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머나먼 탈출의 길을 지켜준 것은 1만 병사-시민의 집합적 지혜였다. 그들은 적군의 추격과 매복과 습격을 막아내고 눈보라와 굶주림을 뚫고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넉 달 만에 고향에 다다랐다. 그들의 안전한 귀향은 가장 위급한 때 발휘된 민주주의 신념의 승리였다.
크세노폰은 아테네 시민이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야말로 크세노폰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힌 정치적 유전자였다. 귀족도 여기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체득해야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최상의 수준으로 높였던 페리클레스가 그런 사람이었다. 크세노폰처럼 페리클레스도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민중을 무조건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소수 귀족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아테네 황금시대는 시민의 신뢰와 헌신의 힘으로 열렸다. 크세노폰의 참전 30년 전에 페리클레스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했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자유의 기풍 속에 자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지닌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이겨냅니다.” 페리클레스 연설이 밝힌 민주주의 정신 안에서 크세노폰의 기적이 자랐다. 세계 경제가 대공황으로 빠져들고 나라는 제2의 외환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바빌론에 갇혔던 만인대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 위난에 응전할 힘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집합적 지혜와 결의에서 나온다.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지면, 그 끝은 출구 없는 자중지란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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