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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26 20:32 수정 : 2009.02.26 20:34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한겨레프리즘

우리말에 ‘코 묻은 돈을 빼앗는다’는 표현이 있다. 철없는 애들을 상대로 한 어른의 파렴치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경련이 25일 내놓은 대졸초임 삭감 방안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을 떠넘긴 일종의 ‘코 묻은 돈을 빼앗는’ 행위 아닌가?

대졸초임 삭감 방안이 나온 배경은 심각한 고용난이다. 지금 추세라면 ‘실업자 100만명 시대’도 시간문제다. 노동계도 고통분담이 기존 일자리를 지키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동참하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치가 있다. 지금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이번 경제위기의 책임과 상관이 없다. 책임은 기성세대 몫이다. 또 술잔을 돌려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신입사원들에게 고통분담의 첫 잔을 준 것 자체가 떳떳지 못하다. 전경련은 우리나라의 대졸초임이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수 인재 영입을 이유로 몸값을 올린 장본인은 기업들이다.

새내기는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보호 대상이다. 저항 능력이 약한 그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은 더욱 공정하지 못하다. 취업준비자 53만명, 대졸학력 이상 20대 실업자 13만6천명, 대학·대학원 졸업예정자 57만명을 계산하면 적게 잡아도 100만명 이상이 이번 조처의 잠재적 희생자들이다.

고통분담은 말 그대로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전경련은 대졸초임 삭감이라는 노동자들의 고통분담에 상응하는 경영계의 방안이 무엇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일관했다. 대신 전경련은 대기업 임원들도 이미 연초부터 10~20%씩 연봉을 깎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임원들도 월급쟁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위에는 회사 최고경영자가 있고, 재벌 총수가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대기업 최고경영자나 재벌 총수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직접 고통분담 의지를 보여준 사례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한화 김승연 회장이 최근 “내 월급을 깎아서라도 신입사원을 더 뽑으라”고 지시한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최고경영자나 재벌 총수가 십시일반을 한다고 해서 금액이 얼마나 되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이웃 일본의 얘기지만 메모리반도체 업체인 엘피다의 최고경영자는 올해 1분기 월급을 스스로 절반이나 깎았다. 우리 현실은 거꾸로 가는 듯하다. 삼성전자는 이건희 전회장 등 물러난 최고경영자 5명에게 300억원의 퇴직금을 줄 계획이다. 전경련의 대졸초임 2600만원을 기준으로 하면 1153명의 젊은이를 뽑을 수 있는 거액이다. 전경련과 30대 그룹의 자세도 아쉽다. 그들은 100만명이 넘는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고통분담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에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대전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일은 출발부터 빗나갔다. 당장 노·사·민·정 대합의에 참여한 한국노총마저 반발한다. 일부 30대 그룹들도 발표 당일까지 내용을 몰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경련이 청와대와 교감 속에 일부 그룹들과의 협의만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같은날 취임 한 돌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이 “일희일비하거나 좌고우면하지 말라”고 독려한 게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번 조처의 잠재적 희생자들인 100만 젊은이들은 ‘이명박 세대’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이들은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고 좌절을 맛보게 됐다. 또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해 깊은 불신을 품게 됐다. 앞으로 피해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미안하다, 이명박 세대들아!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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