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2.19 21:41
수정 : 2009.02.1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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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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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핵과 미사일은 짝을 이루는 젓가락처럼 한 쌍이 돼야 위력을 발휘한다. 미사일 없는 핵은 전시용일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이 1998년 4월 사정거리 1300㎞의 가우리 미사일 발사시험 뒤 한 달 만에 핵실험을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미국 정보기관이 보기에, 이 가우리 미사일은 북한의 중거리 노동미사일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북한은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 등 우라늄 농축기술을 서로 맞교환했다는 것이다. 미사일 기술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도 핵개발과 미사일의 함수관계를 잘 보여준다. 북한의 무기·군사체제 전문가 조지프 버뮤디즈는, 북한이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주요 시험발사를 한 것으로 분석했다. 처음은 93년 5월 3발의 스커드B/C 단거리 미사일과 사거리 1300㎞로 일본열도를 공격할 수 있는 첫 중거리 미사일인 노동미사일 발사다. 93년 3월 1차 핵위기인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두 달 뒤였다. 94년 제네바 합의로 핵개발은 동결됐지만 미사일 개발엔 제약이 없었다.
두 번째 실험은 98년 8월31일 대포동 1호(백두산 1호)였다. 북한은 이를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라고 했다. 실제로 3단계엔 고체연료 추진체의 인공위성을 실었다. 미국 본토까지를 겨냥한 3단계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자, 강성대국을 내건 98년 김정일 시대를 기념하는 체제 결속 등 다목적용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 제네바 합의는 북-미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지 못했고, 금창리 핵의혹 등으로 북-미 관계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북한이 98년 파키스탄에서 우라늄농축 핵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한 것도 이런 상호 불신 등 정세의 불안정과 관련이 있다. 결국 미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 가능성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바꿔놓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동시에 미국은 포용정책 기조 아래 북-미 미사일 협상을 벌였고, 같은해 10월 북-미 관계 정상화의 내용을 담은 공동 코뮈니케 발표와 함께 미사일 수출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험 등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문턱까지 갔다.
세 번째는 2006년 7월5일 대포동2를 포함한 7발의 미사일 발사였다. 당시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자위적 국방력 강화를 위한 군사훈련’이라며 대포동2가 군사용임을 숨기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가 양자 대화를 거부하고 금융제재로 압박을 가한 데 대한 무력시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파키스탄이 보여주듯 이 미사일 발사는 10월의 핵실험과 짝을 이룬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로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대포동2 발사 움직임은 두 가지 점에서 2006년과 다르다. 우선 핵실험을 한 뒤다. 2년 이상 성능개선 등 보완이 이뤄졌다. 따라서 훨씬 위협적이다. 또 하나는 북한이 2006년과 달리 인공위성임을 시사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 때의 미사일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부시는 이 미사일 협상의 진전을 무시했으며, 협상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클린턴·부시 행정부에서 대북특사를 지냈던 잭 프리처드 한국경제연구소장은 이를 ‘중대한 외교적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과거 합의했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조처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17일 일본에서 미사일 협상 수용 의사를 밝혔다. 발사 유예인가, 강행인가.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큰 흐름은 핵과 미사일의 온전한 협상이 될 것이다.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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