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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10 21:54 수정 : 2009.02.10 21:54

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프리즘

파우스트적 유혹을 인간 욕망의 보편적 문제로 풀어낸 사람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지만, 그 유혹을 정치의 본질로 끌어들인 사람은 막스 베버다. 베버는 1919년 1월 뮌헨대 강연에서 정치를 악마(데몬)와 관계 맺는 일, 정치가를 악마적 힘과 손잡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치에 대해 무슨 특별한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의 본질적 속성이 본디 그토록 위험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왜 위험한가. 정치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베버가 말하는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정치는 국가를 장악해 운영하는 일인데, 모든 근대 국가는 폭력 독점체다. 경찰·군대를 위시한 공권력은 통치자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쓰이는 ‘폭력기계’다. 이 폭력이 바로 데몬적 힘이고, 국가를 장악한 정치가는 데몬과 손잡은 자일 수밖에 없다. 데몬이 날뛰면 나라는 폭력극장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므로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이야말로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치가가 데몬의 열정만 있고 그 데몬을 제압하고 다스릴 책임감과 냉철함이 없다면 나라는 데몬의 것이 된다. 그 데몬이 풀려나 질주한 결과를 우리는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보았다. 더 물러설 곳 없는 사람들을 불온한 사람들로 만들어 놓고 테러진압 특공대를 들이밀었다. 화마가 갈 곳 없는 세입자들을 삼켰다.

데몬을 얻은 데 상응하는 대가로 정치가가 치러야 하는 것이 책임이다. 이것이 베버의 요점이다. 책임윤리는 진정한 정치가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다. 아마추어 권력정치가, 정치적 벼락출세자의 공통점은 이 책임윤리가 허약하다는 데 있다.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지만, 그때의 폭력은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 책임윤리가 있는 정치가라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폭력 사용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해야 하며, 그러고도 그 정당성을 면밀히 가늠해야 한다. 정당성은 주권자의 동의에서 나온다.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설령 합법적인 폭력이라 하더라도 정당하지 않다. 용산 참사로 이어진 공권력 투입은 합법성도 정당성도 결여한 과잉진압이었다. 거기에 면죄부가 발부됐다. ‘뭉개기’ ‘말 바꾸기’ ‘뒤집어씌우기’가 지난 20일 동안 이 나라 정치의 풍경이었다.

말년의 이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를 구분한 바 있다. 도덕적 정치가가 정치 행위의 어려움 속에서도 도덕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정치적 도덕가는 도덕군자연한 말씀을 주워섬기면서 실제로는 사욕과 정략만 생각한다. 칸트는 이 정치가들이 수시로 법과 원칙을 떠드는데, 그들이 정작 좋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폭력이며 원칙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일갈한다. 이 그릇된 정치가들이 즐겨 쓰는 술책 가운데 하나가 ‘저지르고 나서, 부정하라’라는 준칙임을 칸트는 명시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결과적으로 국민을 절망에 빠뜨리고 저항으로 이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하라. 반대로 그 잘못된 결과가 피통치자의 반항 때문이라고 주장하라.” 비린 권력은 이 낡은 준칙에 의존한다.

90년 전의 그 뮌헨대 강연에서 베버는 권력정치가의 함정을 들여다보았다. “권력정치가는 막강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 이들은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내적 붕괴를 겪는데 “그 과정을 통해 이들의 허풍에 찬, 완전히 속 빈 제스처의 이면에 어떤 나약함과 무력감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베버의 진단은 현재형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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