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28 14:48
수정 : 2009.01.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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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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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비혼, 명절이 그리 바쁠 것은 없었다. 고속도로 저쪽 끝에 가야할 고향도 없었고, 꼭 참석해야 할 설날 차례나 친척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길고도 짧았던 연휴 시간을 메워준 것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담집 <결혼제국>, 그리고 친구와의 맥주 수다 ….
먼저 꽃보다 남자. 재벌가 꽃미남 4인방과 서민 소녀 연애담을 처음 만난 건 15~16년 전이다. 일본 원작 만화 해적판이었던 <오렌지 보이>로 시작해, 이후 정식 판본으로 36권 완결을 보았다. 드라마로는 대만판과 일본판을 거쳐, 이제 한국판을 본다. ‘황보명·츠카사·따오밍쓰·구준표 …’ 같은 주인공을 두고 기억나는 이름만 넷이니, 어지간히 보고 또 본 셈이다. 내용이야, 뭐 사실 ‘후덜덜’하게 유치하다. 하지만 유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다음에야 유치함은 더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구준표의 까칠하고 귀여운 거만스러움과 윤지후의 고독한 턱선을 즐기면 그만이다.
결혼제국은 밀린 드라마를 보는 짬짬이 읽었다. 대담집의 열쇳말은 ‘비정규직 비혼여성 세대의 10년 뒤’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여성·가족 문제에 천착한 상담전문가 노부타 사요코가 일본 30대 여성들의 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눈 내용이다. 현재 일본 30대 여성은 사회 진출 무렵 형식적 남녀평등을 경험하고, 만혼·저출산을 추세화한 세대다. 하지만 대다수가 고용 유연화 흐름에 휩쓸려 남자들보다는 더 빠르게 기간제·시간제 일자리로 밀려났다. 또 일부 정규직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유리 천장’이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우에노 등은 30대 비혼 여성의 소비력이나 심리적 안정감이 부모 세대의 지원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고성장 시대, 안정적 일자리와 수입을 누렸던 부모가 쌓은 경제력, 주거 공간에 기대어 살았기에 변변찮은 일자리와 수입으로도 비교적 높은 소비 수준과 쾌적한 삶을 지탱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뒤 이들 부모가 축적한 재산이 바닥을 드러내고 늙고 병들어 고비용의 부양을 요구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면 이들은 저숙련 비정규직의 암담한 현실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 한다. 이들은 ‘준비된 비혼’이라기보다 막연히 결혼하면 인생을 다시 시작(리셋)하게 될 것이란 기대로 노후 등 인생 설계를 미뤄 온 ‘모라토리엄 비혼’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 가운데 전례없이 많은 수가 자의반 타의반 항구적 비혼이나 또다시 비혼(돌싱)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삐끗하면 빈곤층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에 바짝 다가서 있다.
우리 현실도 여기에서 아주 멀리 있지는 않은 듯하다. 부모 세대처럼 죽을 때까지 모기지론으로 빼먹을 집도 없고, 연금이나 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최악의 경제적 불안정층 얘기는 남 일이 아니다. 드라마 속 전문직이나 전문기술 직종 여자들은 ‘진정한’ 사랑과 자아실현에 바쁜데, 대개는 먹고살 걱정이 더 시급한 게 현실이다. 우에노 식으로 얘기하면, 이런 삶이 ‘당분간’이 아니라, ‘계속’이라는 걸 깨닫는 데서 비혼 세대의 진짜 인생 설계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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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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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에 현실이 고달플수록 신데렐라 얘기는 유난히 잘 팔린다고 한다. 맥주 한잔에 한참을 투덜거리던 친구는 ‘우리 준표’ 얘기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도 꽃보다 남자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텔레비전을 끄면 환상과 현실의 단절이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그러니 세련되게 포장된 여성 전문직 드라마보다 사회적 해악이 덜하다고 변명한다면, 우리 준표에 대한 편애일까, 퇴행일까? 사회정책팀/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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