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15 19:56
수정 : 2009.01.1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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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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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1970년대 말 한 재벌그룹 ㄱ 회장에 관한 일화다. ㄱ 회장이 경영진들과 회의를 하는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청와대 인사는 대뜸 당신 부인이 지금 하와이에서 골프 치고 호화쇼핑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아느냐고 다그쳤다. 그는 바로 사실 확인에 나섰고, 잠시 후 부인에게는 당장 귀국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정부 주도 경제체제에서 기업은 사실상 국가 소유였고, 재벌 총수도 관리인에 불과했다. 재벌 총수 부인이 회삿돈으로 외국에서 사치하는 것은 국가재산의 유용이었던 셈이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한국 사회는 지난 30년 사이에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경제가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뀐 게 대표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한 게 상징적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세상은 다시 바뀌는 듯하다. 4대 그룹의 한 임원 사무실에 갔더니 책상 위 문서를 하나 보여줬다. 2008년 투자·고용 실적과 2009년 계획치를 알려 달라는 전경련의 공문이었다. 그는 “두세 달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 의미 없는 계획치를 왜 자꾸 달라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대충 적어 낼 수도 있지만, 실정을 모르는 얘기다. 각 그룹의 투자·고용 계획은 바로 청와대로 보고된다. 대기업의 새해 인사에서 임원 교체 폭이 예상보다 작은 것에도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 삼성과 엘지가 설 전에 대규모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감원이다, 임금삭감이다 하는데 옆에서 수천억 돈잔치를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고, 올해 경영 전망도 불확실해 고민이 컸는데, 청와대에서 “돈이 돌아야 내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니까 가급적 지급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정부가 때로는 기업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개별 기업으로서는 부담이 돼도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지켜야 할 선이 있다. 협조요청이 부당한 경영간섭이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주요 그룹들은 정부로부터 이상한 요청을 받았다. 기업들이 연말이면 으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내던 이웃돕기 성금 출연을 잠시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올해까지는 예전처럼 하라는 연락이 오면서 기업들이 어리둥절해했다. 법상 국내 유일의 전문 모금기관인 모금회의 회장과 사무총장이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사람이라며 정부가 트집을 잡은 게 사태의 진상이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사회 단체들에 대한 기업들의 지원이 약속이나 한 듯 끊긴 것도 정부 입김 탓이라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이는 경제 살리기와는 무관하고 시장경제 원리에 배치되는 일이다. 특히 사회 전체를 내 편 네 편 동강 내고, 이념대립의 장으로 몰아넣는 데 기업들을 앞장세우는 것은 당자들로선 엄청난 부담이다. 수법도 아주 교묘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과거에는 공문 같은 것을 보내서 증거가 남았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서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났을 때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한다”고 말한다. 청와대는 물론 국정원까지 동원됐다는 말마저 나온다. 마치 정부가 나서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시곗바늘이 5공이 아니라 아예 3공으로 돌아간 듯하다”고 말한다.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반동이 성공한 적 있는가?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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