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30 21:37
수정 : 2008.12.3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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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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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토머스 홉스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놀란 여인이 공포로 허둥대다 조산한 아이가 훗날의 홉스였다. 거의 생득적이었던 그의 두려움은 왕당파와 의회파가 다투던 어지러운 정치상황 속에서 증폭됐고, 망명지에서 쓴 <리바이어선>의 바탕음을 이루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가 되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자연상태’가 그의 세계상이었다. 이 자연상태를 끝장내려면 단단한 통치체제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려움이 촉발한 방어기제가 강력한 권위의 통치자를 요청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뒷날 ‘절대군주’를 옹호했다는 오명을 썼지만, 실상 그가 무제한의 권력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통치자의 권력은 인민이 부여한 것이라는 명제야말로 홉스 사상의 핵심이었다. 통치자와 인민의 관계는 ‘신의에 기반을 둔 계약’ 관계였다.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계약 목적을 저버린 통치자에게 인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홉스는 무조건 복종을 주장하지 않았다.
홉스만큼 두려움이 없었던 존 로크는 선배가 자물쇠를 딴 저항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로크는 통치자의 권리가 인민으로부터 신탁받은 것임을 명확히했다. 통치자의 권력은 인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선을 지키는 일로 제한됐다. 인민에게는 통치자의 폭정에서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그 폭정을 예방할 권리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노예가 된 뒤에 자유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 사슬에 묶인 뒤에 자유인처럼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입법부가 폭정의 전초기지가 된다면 그것은 신탁위반이자 일종의 반란행위라고도 했다. 신의를 깨뜨린 계약은 무효가 된다. “입법부가 야심·공포·어리석음, 또는 부패로 말미암아 인민의 생명과 자유의 권리를 다른 자들에게 넘겨준다면, 그들의 권력은 인민에게 되돌아간다.” 로크의 사상은 급속히 번져 미국 독립전쟁의 정신이 됐고 프랑스 대혁명의 밑불이 됐다.
홉스가 터를 잡고 로크가 세운 근대 자유민주주의 정치 원리가 탄생한 지 300년이 넘었다. 그 세월에 로크의 사상은 상식이 됐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 상식이 몰상식에게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세우겠다고 공언하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공중파 방송은 국민의 언론자유를 대행하는 국민의 재산이다. 그 재산을 재벌과 조·중·동한테 넘겨준다면, 그것은 자유의 공기를 틀어막는 일이며 삶의 터전인 민주주의를 허무는 일이다. 방송법을 포함한 이른바 ‘엠비 악법’ 강행은 국민의 신탁을 배반하는 계약 위반 행위다.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프리모 레비는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가 목격하고 체험한 일 가운데 가장 섬뜩한 것이 ‘무슬림’이었다. 무슬림은 살아 있는 미라를 가리키는 수용소의 은어였다. 절망의 한계상황에서 삶의 저점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이 무슬림이었다. 그들은 껍데기만 남은 무감각의 생명체였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레비가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라고 묘사하는 이 무슬림들은 하나같이 석 달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의 비탈길로 내려갔다.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는 사람들만이 무슬림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레비는 증언한다. 저항이야말로 생명의 최소 조건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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