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04 20:52
수정 : 2008.11.04 20:52
|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
한겨레프리즘
십여년 전 여름, 배낭을 꾸려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요즘 20대는 인도 빈민촌, 페루 마추픽추, 심지어 아프리카 오지를 예사로이 넘나들지만, 당시는 약속한 듯 유럽으로 몰려나갔다. 나 역시 흔하디흔한 ‘런던 인-파리 아웃’ 한 달짜리 비행기표를 끊었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갓 넘어선 나라 사람으로, 말만 듣던 선진국 유람을 하려니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88올림픽 강박증 탓일까? 외국인 앞에선 질서를 더 잘 지켜야 한다는 믿음도 철석같았다. 그런데 ‘동방질서지국’ 여행자 눈에 런던 동네는 너무나 무질서했다. 신호등이 빨간불인데도 차 흐름이 잠깐 끊기면 그냥 길을 건넜다. 뒤늦게 도착한 운전자들이 급정거 뒤 삿대질을 하지 않는 것도 퍽이나 이상했다.
이나저나 나는 ‘어글리 코리안’ 소리를 저어했다. 텅 빈 도로 앞 횡단보도에서도 ‘한국식 질서’에 따라 하염없이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신호가 한참 바뀌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칠 무렵, 그 동네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신호기 단추를 꾹 누르더니 빨간불을 파란불로 바꾸곤 유유히 길을 건너가 버렸다. 그제사 나는 ‘보행자 우선’이란 새로운 질서의 존재를 실감했던 것 같다.
지난해 늦가을, 첫아이를 낳은 여고 동창 집에 친구들과 다니러 갔다. 당시 임박한 대선에선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게 분명해 보였고, 친구들의 수다는 새 정부 집값 전망으로 옮아갔다.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며 살기를 바라는 서른두세 평 아파트값은 까마득히 비쌌다. 서울에선 6억원을 넘어섰고 신도시로 나가도 4~5억원대를 넘나든다 했다. 크든 작든 아파트를 사고 나면 대출 원리금을 갚느라 궁색하게 살아야 할 게 뻔했다. 대출 이자만 다달이 100만원을 넘긴다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파트 재테크’ 질서를 성토하고 또 성토했다.
그러나 어찌할까? 유력한 대통령 후보는 건설사 최고경영자 출신에 대운하 건설 등 ‘토건국가’ 성장론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날 동창 모임에선 부동산 불패 신화를 미는 대세론이 아파트값 거품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경계론을 살짝 이겼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고, 부동산 투기 제한 해제 등 모든 정책이 너무나 짐작처럼 흘러가고 있다. 미국발 금융 대란에서 촉발된 위기는 기존 경제 질서의 맹점을 드러냈지만, 현 정부는 질서를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최근 경제위기 대책은 각종 투기 규제를 풀고 건설사를 살리는 데 집중됐고,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높일 복지 확대는 시늉에만 그쳤다.
일년 전 혼란에 빠졌던 내 여고 동창들한테 주는 정책 메시지는 간명하다. 일단 아파트를 사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곤궁한 삶을 버티는 질서에 순종하란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애면글면 모은 예금 통장이 한 순간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서울 거리를 압도하는 자동차 오만의 질서 정도야 참을 수도 있다. 반드시 횡단보도로만 건너고, 신호가 바뀌어도 한발 늦게 길을 건너자고 마음을 다잡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파트 재테크 질서만큼은 인생 좋은 시절을 모조리 걸라고 하니, 도무지 견디기가 어렵다. 그나마 88만원 세대는 이런 삶의 질서에 부응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나라의 길을 걸어본 세대가 늘어만 간다. 이들은 건널목을 지나는 법도 훨씬 다양하게 경험했을 것이다. 이들 눈에 우리 삶의 질서가 어떻게 비칠지, 현 정부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다.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seraj@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