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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28 21:02 수정 : 2008.10.28 21:02

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프리즘

‘리·만 브러더스’라는 경멸어는 국내용을 넘어 이제 국제적 용어가 될 모양이다. 대통령과 경제수장을 조롱하는 시중의 농담이 <로이터> 통신에까지 소개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 통신은 ‘추락하는 한국의 금융시장’을 이 경멸어의 유행 배경으로 제시했다. 소망교회 신앙동지인 선장과 1등 항해사가 표류하는 배 위에서 두 눈 꼭 감고 방성기도 하는 모습이 지금 대한민국의 시황이다. 부실한 항해술을 기도로 메우려는 것인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군주(프린치페·principe)는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지배자 또는 지도자다. 500년 된 이 정치 팸플릿은 근대의 여명기에 처음으로 인민 대중을 발견한 저작이기도 하다. 군주의 카운터파트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이다. 귀족은 갈아치울 수 있지만 인민은 언제까지나 같이 가야 할 정치의 터전이자 국가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당대의 통념을 산산조각 냈다. 대중의 발견이라는 업적을 업고 마키아벨리는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 많이 참조되고 탐구되는 인물이 됐다. 마키아벨리 연구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에서 <군주론>을 정치교과서의 전범으로 삼아 분석했다. 그는 공산당을 ‘현대의 군주’라고 묘사했다. 미국 네오콘의 사상적 뿌리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의 겉면과 내면을 깊숙이 탐색했다. 그의 후예들은 조지 부시를 ‘현대의 군주’로 주조했다. 마키아벨리 전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상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마키아벨리를 비난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정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현대의 지도자 치고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으로 무장한 정치전술을 활용하지 않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일 리 없다.

마키아벨리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부도덕을 설교했다는 데 있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군주는 약속도 팽개칠 수 있어야 하고 무자비한 수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대중 조작 기술’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가 비난받는 또다른 이유다. 그는 군주가 선한 성품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주는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권력을 얻을 수도 지킬 수도 없다. 마키아벨리가 ‘악의 교사’라는 타이틀을 얻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이 속류 마키아벨리즘을 넘어 더 중요한 곳을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은 종종 망각된다. 마키아벨리는 사악한 수단으로 권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고 확언했다. 인민의 진심 어린 지지를 얻지 못한 군주는 요새를 잃어버린 장수와 같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군주가 인민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은 미움에 더해 경멸을 받는 것이다. 지도자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으면 이미 지도자로서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군주는 마치 암초를 피하듯이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 시선을 지금 대한민국으로 돌려보면, 암초가 코앞에 있는 형국이다. 금융시장은 대통령의 말도 경제수장의 말도 듣지 않는다. 어떤 호소도 먹히지 않는다. 신뢰가 떠나버린 자리를 경멸이 채우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서두에서 때늦은 해결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경고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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