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3 20:10
수정 : 2008.10.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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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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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10월22일은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경영퇴진을 한 지 6개월이 되는 날이다. 한국언론들은 당시 “삼성이 소유-경영 분리의 시험대에 올랐다”고 썼지만, 정작 16만6천여 삼성맨들은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최근 만난 삼성의 한 최고경영자는 “주인이 출타 중인 상태”라고 표현했다. 겉보기에 삼성은 70년 동안 유지해 온 오너 경영체제의 중심이 사라졌는데도 큰 탈 없이 순항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 속사정은 다르다는 얘기다. 다른 한 임원도 “안 되는 일도 없지만 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사장단협의회가 그룹의 현안을 다룬다고 하지만, 의사결정을 하는 곳은 아니다. 대규모 투자 등을 조정·결정해 온 사령탑이 없다 보니 사장들은 누구와 상의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조 단위의 돈이 필요한 신규사업이나 투자는 사실상 올 스톱이다. 이 회장은 일상 경영에 관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품질, 디자인, 인재, 창조경영 등 삼성의 장기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 왔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옮겨붙으면서 경영 환경도 좋지 않다.
최근 중국의 한 신문이 현 금융위기의 극복 모델을 찾는 기획기사에서 1990년대 말 삼성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을 소개했다. 삼성은 남보다 앞서 위기를 예견하고 부실사업 정리와 대규모 감원이라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를 주도한 것이 구조조정본부다. 물러난 이학수 전 구조조정본부장도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은 구조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삼성의 리더십 위기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룹경영을 하는데 사령관과 사령부가 없는 셈이니, 일이 원활할 리 없다. 이 회장의 퇴진에 대해 모양새가 이상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말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얼굴마담이 아니라 경영의 중심을 확실히 세웠어야 한다.
삼성이 리더십의 공백을 장기화하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해체됐다는 전략기획실이 뒤에서 예전 역할을 여전히 한다는 얘기가 삼성 안에서 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장단 인사를 연내에 앞당겨 할 것이라는 얘기도 내년 3월 주총에서 결정하겠다는 약속과 다르다. 이 모두 4·22 경영쇄신안의 진정성을 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삼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출타 중인 주인이 돌아오거나, 아니면 계열사 독립경영이라는 애초 약속에 걸맞게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드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현재의 분위기로 보면 삼성의 선택은 전자 쪽이다. 마침 이 회장의 발목을 잡았던 경영권 불법세습 혐의가 1·2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삼성이 헤아려야 할 것은 국민의 마음이다. 이 회장의 복귀가 공감을 얻으려면 재판 결과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열사의 한 사장은 지난 1년의 삼성 모습을 ‘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쓰레기가 드러난 것’에 비유했다.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한 성장통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실질적인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이사회 중심 경영 같은 투명한 지배구조 구축은 선결과제다. 법적 실체가 없었던 구조본 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도 긴요하다. 비판적인 언론이나 시민단체와의 소통 방식에도 성찰이 요구된다. 삼성은 2006년 2·7 대국민 사과 때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반성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으로는 신뢰의 붕괴가 꼽힌다. ‘출타 중인 삼성의 주인’이 돌아오려면 신뢰 회복이 관건이다.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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