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16 20:07
수정 : 2008.10.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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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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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북핵이 길고 험난한 길을 지나 2단계의 마무리 국면에 왔다. 지난해 10월3일 2단계 불능화 합의 이래 이번 신고 및 검증의정서 합의와 테러지원국 해제에 이르기까지 불과 1년 사이에만도 숱한 고비가 있었다. 북한은 핵 재처리까지 나갈 태세였고 2년 전 핵실험을 했던 풍계리에선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황이 포착됐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아니 더 심각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런가 보다였다. 게리 새모어 미국 외교협회 부회장이 최근 서울에서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옛날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북핵은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일촉즉발의 대치와 긴장 그리고 엎치락뒤치락의 반전, 다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데 따른 불안감 등 드라마틱한 요소를 골고루 갖췄다. 미국이 제재로 압박에 나서고 긴장이 고조돼 군사적 대비에 나서면 북한은 남한을 인질로 삼을 것이다. 서울에서 불과 50㎞ 지점에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는 1000만 이상의 수도권 시민을 겨냥하고 있다. 미 2사단이 후방으로 배치된다 해도 북한 미사일 사정권 안에 있다. 스토리는 진부해도 공포의 균형이 깨지면 영화는 현실이 된다. 누구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 포용의 논리는 이런 현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쪽 사람들 가운데는 협박에 굴복하는 건 협박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며 포용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도 말했듯이 이번 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지켰다. 새모어 부회장이 일찍부터 지적했듯이 플루토늄부터 시작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및 핵확산에 대한 검증으로 가는 단계적 접근은 현실적인 방안이다. 게다가 모든 핵에 대한 검증은 견지되고 있다. 미신고 시설 검증을 놓고 ‘상호 합의’를 전제로 한 건 미국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검증의정서에 합의함으로써 양보했다. 누구도 굴복당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두고 북한이 아니라 우리가 벗었다고 말했다. 그건 한쪽만 보는 것이다. 마이클 그린 전 미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수석국장은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 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외눈박이다. 부시 행정부 내 갈등, 이른바 ‘워싱턴의 분열’은 미국 또한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가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동맹의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었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일본 <아사히신문> 대기자 후나바시 요이치가 쓴 <김정일 최후의 도박>에는 2002년 2차 핵위기 이래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까지 북핵을 둘러싼 외교현장의 내밀하고도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다. 거기엔 이런 대목이 있다. “부시 정권에서 대북정책이 혼란을 빚은 최대 원인은 부시 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흔히 북한 쪽 협상 대표들은 재량권은 눈곱만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6자 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였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 6자 회담에 갔을 때 “원숭이도 훈련시켜 영어만 할 수 있게 하면 이런 일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지금 국내의 일부 보수 쪽 논자들은 이번 합의를 놓고 “이젠 부시도 못 믿겠다”고 말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협상 상대로 보고 만나겠다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어쩌려는지. 무모함을 용기로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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