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7 19:54
수정 : 2008.10.0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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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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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1997년 <거대한 체스판>을 펴냈을 때, 국제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드넓은 시야는 당당한 자신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한갓 체스판쯤으로 보는 그의 눈은 말 그대로 제국의 눈이었다. 그는 미국이 로마제국의 영광을 넘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에는 자기 조국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치비스 로마누스 숨.”(Civis Romanus sum) 그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뜻의 이 라틴어 문장은 긍지의 문장이자 선망의 문장이다. 미국인이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미국 바깥의 사람들이 미국 시민 되기를 열망하는 것이 지금의 세계라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이 당당한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7년 뒤 펴낸 <제국의 선택>에서 그는 다소 위축된 표정으로 미국의 지도력이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했다. 미국의 전지구적 지위에 균열이 생겼으며 서둘러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걱정을 감추지 않았다. 3년 뒤 그의 초조감은 더욱 절박해졌다. 2007년 2월 미국 상원 청문회에 나온 그는 미국이 역사적·전략적·도덕적 재앙 상태에 빠졌다고 증언했다. 그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빌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조지 부시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2001년 9·11 테러는 ‘재앙’의 시발점이었다. 9·11은 미국의 세계 지배 방식에 근본적 의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분노 이전에 반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은 ‘람보의 완력’으로 약한 자들을 두들겨 팼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모래와 먼지뿐인 이 나라를 한번 더 초토화시켰다.
결정적인 것은 2003년 이라크 침략이었다. 나라를 내전과 증오의 피바다로 만든 이 침략전쟁의 명분은 ‘테러세력 비호’와 ‘대량살상무기 은닉’이었다. 그러나 테러세력과의 유착도, 대량살상무기 은닉도 없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거짓 명분 뒤에 숨은 진짜 목적이 부시의 사적 복수심과 석유 탐욕에 있다는 것을 세계인이 모두 알았다. 미국은 군사대국의 위력을 과시했을지는 모르지만, 지도력과 존경심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부시 집권 2기 동안 미국은 지난 세월 힘들여 축적한 도덕적 자산을 거의 탕진했다. 미국이 이토록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위세 때문에 앞에선 푸들이 되어도 돌아서면 경멸감을 감추지 않는다. 제국을 지탱하는 한 축인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신뢰가 붕괴한 것이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쳤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좌초를 알리는 월스트리트 파국은 전략가 브레진스키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유일 패권이 최소한 한 세대, 잘하면 두 세대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 전망은 미국 주도의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유지된다는 전제를 바탕에 깐 것이었다. 상황은 그런 전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수년 전부터 세계 유수의 경제연구기관들은 중국 경제 규모가 이르면 2020년, 늦어도 2025년이면 미국 경제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월스트리트 파국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부시 집권 8년 동안 우리는 미국의 유일 패권, 절대 제국의 오만이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꺼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남더라도 더는 절대적 지위를 누릴 수 없음은 분명하다. 미국은 여러 열강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사태의 도래에 대응해야 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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