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2 22:02
수정 : 2008.10.02 23:34
|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
한겨레프리즘
“외환위기 때는 기업부채가 400%를 넘었지만 지금은 100% 이하고, 외환보유액은 당시 경상 지급액의 3개월도 안 됐는데 지금은 6개월 이상이다. 펀더멘털에서 큰 차이가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외환위기 재발 불가론’이다. 맞는 얘기다. 우리의 기초여건을 고려할 때 시장의 반응이 너무 민감하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도 한국 경제가 외부 충격에 남들보다 더 요동치고, 위기설이 끊이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정부의 신뢰상실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 근본배경으로 정부의 잇따른 정책대응 실패와,‘성장 우선’에 사로잡힌 정책 방향 오류를 꼽는다.
“삼성전자의 수출입 자금에 붙는 가산금리가 0.35%였는데, 지금은 네 배인 1.5%까지 치솟았어요.” 최근 금융시장 경색의 심각성을 전하는 외국계 은행 임원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깝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미국 구제금융법안 처리가 부결된 직후 “한국의 물가·주가·환율의 충격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같은날 8월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9월 무역수지가 넉 달째 적자를 이어갔다는 보도를 무색게 했다.
정부가 ‘9월 위기설’을 잠재우겠다며 호언한 10억달러 채권발행이 실패한 게 지난달 12일이다. 한 은행 임원은 “9월 위기설을 넘긴 것은 다행이지만, 리먼브러더스 등이 이미 위기에 몰린 급박한 시장상황도 파악 못하고 호기를 부린 정부의 무능에 기가 찰 뿐”이라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이다. 국가신용을 건 채권발행이 실패할 정도로 심각한 것을 알았다면 바로 다음 대응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딴판이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뒤에도 대통령은 “(나 같으면) 펀드를 사겠다”고 큰소리쳤다.
반면 이성태 한은총재는 “실물경제 위기가 이제 막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자금경색이 본격화하면서 기업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 총재는 직전에도 “금융불안이 지났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금융감독기구의 간부는 “지금 한국경제를 두고 제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사람은 한은총재”라며 “정부가 잘못된 환율정책으로 물가불안 심화를 불러오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고 말했다.
세계는 지난 10년 동안 풍부한 유동성에 힘입은 엄청난 자산가치 상승 덕택에 파티를 즐겼다. 이제 거품을 걷어내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은 국민에게 이를 호소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다. ‘747’ 같은 장밋빛 공약은 깨끗이 잊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장병 환자’의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주택 500만호 공급과 여의도의 100배를 넘는 그린벨트 해제는 무리한 건설경기 부양책이다. 비상이 걸린 그룹총수들을 청와대에 불러놓고 투자·고용 확대 타령을 한 것도 오판이다. 재계에선 “폭풍이 몰아쳐 모든 배들이 닻을 내리고 대피하는데, 정부는 출항을 재촉하는 꼴”이라고 말한다. 빈사상태에 빠진 중소기업 대책도 더 서둘렀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정부는 8월 초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리고 정책방향을 선회했다. 정권이 달린 총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책실패를 자인하는 모습은 한국정부와 너무 대조적이다.” 최근 만난 일본 주재 재계 인사의 탄식이다. 아마추어는 봐줄 만하다. 그러나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독불장군’은 구제불능이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한은총재에게서 조언을 얻으라.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