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8 21:07
수정 : 2008.09.1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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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우 선임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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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법치주의, 법의 지배, 법과 제도의 선진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말들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법률가대회 축사를 통해 “어떤 이유에서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법을 잘 지키라는 으름장이다.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의 법은 우리의 삶을 잘 보듬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보호해주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추석 연휴 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아갔다. 꽉 닫힌 회사 정문 옆에는 ‘우리도 일하고 싶다’는 글귀가 새겨진 나뭇조각이 세워져 있고 촛불이 그 절박한 소망을 비추고 있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맞서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문자메시지로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 3년 넘게 직접 고용과 정규직화를 외치며 싸우고 있는 곳이다. 회사는 불법파견에 대한 벌금 500만원을 물었을 뿐이다. 도급 전환과 무차별 해고를 지휘한 것으로 보이는 회사는 단기 근로계약을 맺고 사람을 써온 탓에 해고 노동자에 대한 법적 책임도 벗어난 상태다. 오로지 회사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서 되는대로 사람을 뽑고, 실컷 부려 먹고, 멋대로 잘라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어디에 있는가. 김소연 분회장과 함께 단식농성을 한 유흥희 조합원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법은 비정규직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악스런 자본의 횡포 앞에 오늘 법의 모습은 무력할 뿐이다.
국회 앞 국민은행 옆엔 굴착기 공사를 피해 자리를 옮긴 자그마한 천막이 있다.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1년여째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비정규교수노조의 농성장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권영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시간강사는 7만2419명이며 주당 9시간 근무할 경우 연봉은 999만원으로 전임교원의 4분의 1도 안 된다. 전체 강의의 3분의 1을 맡고 있으면서도 문서로 된 근로계약 없이 일하고, 방학 중에 조교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으면 다음 학기 강의는 없다. 국립대 42곳 중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보장하고 있는 대학은 단 1곳도 없으며, 사립대 113곳 중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곳이 59곳이다. 고등교육법을 고쳐 시간강사에게도 교원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산 타령과 사학의 반대가 걸림돌이다. 교육부가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대학 자율화 조처라며 내놓은 것이 ‘전임강사’ 명칭의 삭제라니 아연할 뿐이다. 대학 시간강사에 대한 지위와 교육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전임교원에 비례하는 합리적 대우를 통해 차별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는 4년 넘게 외면당하고 있다.
법 바깥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비단 기륭전자 노동자와 비정규교수노조뿐이겠는가. 준법을 강조하기에 앞서 법의 빈구석은 없는지 돌아보고, 법의 목적과 내용이 인권과 부합하는지 성찰해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입법의 계절이다.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제출할 법안들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시민들 모두의 운명에 대해서 평등한 배려를 보여주지 않는 정부는 정당하지 않고 독재와 다름없다는 드워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299명의 의원들은 법을 만들기 전에 법 바깥에서 절망과 싸우는 사람들 곁으로 한 번만이라도 가 보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가는 게 법의 첫걸음일 테니까.
정태우 선임편집기자
windage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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