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수/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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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았을 때의 올바른 대응방식은 ‘신속·투명·솔직’이란 3대 원칙으로 요약된다.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은폐·축소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장기화한 사례가 적잖다. “사고를 신속히 공개하고, 최고경영자가 사고수습을 주도하며, 철저한 사후관리를 통해 재도약의 계기로 삼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했던 ‘돌발사태와 기업의 위기대응’ 보고서의 결론이다. 그러나 현실은 꼭 이론처럼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지난해 10월 ‘삼성 비자금 양심고백’이 나오자 삼성 전략기획실은 “근거 없는 허위폭로가 잇따르고 억측과 오해가 확산되고 있다”며 부인했다. 한화그룹도 지난해 5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의혹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발뺌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삼성 전략기획실의 고위임원에게 “왜 보고서 내용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은 “현실은 (이론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선진국에도 초기대응에 실패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은 사례가 적지 않다. 1989년 미국 엑손사의 알래스카 근해 원유 유출사고가 대표적이다. 경영진은 책임회피에 급급하고 거짓말과 발뺌으로 일관하다 피해가 더욱 확산되면서 수십년 쌓은 기업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어 버렸다. 지에스(GS)칼텍스가 최근 고객정보 유출사건을 맞아 보여준 모습은 앞서 예로 든 기업들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언론보도가 처음 나간 당일 바로 자체 진상조사를 벌여 회사 내부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시인했다. 경찰 수사의뢰와 사장을 책임자로 하는 대책반 구성, 해당 고객에 대한 통지와 피해 가능성 점검 등의 후속조처들이 이어졌다. 다음날 신문의 1면에는 “책임을 깊이 느끼며,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과광고가 일제히 실렸다. 지에스칼텍스 안에서 이견이 없었던 게 아니다. 아직 사건진상도 제대로 모르는데, 너무 성급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회사 임직원 중에는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정보유출은 회사가 아니라, 자회사 일부 직원들이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명하고 공명정대하게’ 대처하라는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단호했다고 한다. 고객정보 유출로 생긴 피해는 아직 보고된 게 없지만, 관리책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올바른 처사였다. 사건 직후 한 중앙일간지는 만평에서 고객정보 유출을 빗대 지에스칼텍스를 기름이 줄줄 새는 회사로 표현했다. 또 지에스그룹이 강한 참여 의지를 보이는 대우조선해양 인수 건이 사실상 물건너 갔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삼성 비자금 사건 당시 진실보도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언론단체들한테 ‘삼성왕국 지킴이’라는 오명을 얻은 신문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지에스로서는 뼈아픈 일이다. 최근 개인정보 침해행위가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의 반향이 만만찮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짚고 갈 대목은 위기상황에서 신속·투명·솔직하게 대응한 기업을 무조건 비판하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도 잡아떼고 보는 다른 사례들에 비춰보면 오히려 격려를 해주고 차분히 후속조처를 지켜보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선진국에도 위기대응을 잘한 기업이 사회적 평판이 높아진 전화위복 사례가 많다. 위기를 맞아 진실을 숨긴 기업과 솔직히 털어놓은 기업에 대해 사회가 어떤 다른 평가와 대우를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차이가 없다면 신속·투명·솔직의 위기대응 3원칙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한다.곽정수/대기업 전문기자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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