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05 21:21
수정 : 2008.08.05 21:21
|
고명섭 책·지성팀장
|
한겨레프리즘
대한민국 외교의 축은 남북관계다. 세계 4대 강국이 국가 이익을 걸고 각축을 벌이는 전략지대가 동북아시아이고, 더 좁히면 한반도다. 남북 공조가 튼튼해지면 대한민국 외교는 강국들이 일으키는 거친 풍랑에 웬만해선 휘둘리지 않는다. 반대로 남북 협력이 무너지고 대결로 치달으면 외교는 축을 잃게 된다. 작은 파랑에도 요동치고 키를 잘못 잡으면 표류한다. 지난해 10·4 남북 공동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열 달 뒤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을 꾸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었다. 남쪽 응원단을 태운 열차가 휴전선 철조망을 지나 평양에서 북쪽 응원단을 태우고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에 도착해 전 세계인의 환영을 받는 가슴 벅찬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새 정권이 들어서고 몇 달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공동응원단은 제쳐두고 남북 공동입장도 못하게 됐다. “6·15 선언도 다 부숴버리더니 무슨 체면으로 공동입장이냐.” 북쪽 올림픽위원장의 힐난에 남쪽 정부가 할말이 없게 됐다. 남과 북이 대결하면 주변 강대국들만 좋아한다.
카를 슈미트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일차로 국가들 사이의 관계, 곧 국제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정치적인 것의 기초는 적과 친구의 구별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명료하게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시작이요 정치의 본질이다. 국제정치는 적을 최소화하고 친구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4강 사이에 끼여 불안하게 떠 있는 대한민국은 친미·친일이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친중·친러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친구들보다 먼저 북한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남북관계는 주권국들 사이의 국제관계임과 동시에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다. 다른 모든 친구들이 이익을 주고받는 거래관계라면, 남북은 민족적 동일성에 기반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내부관계다. 남북이 서로 총질하고 모욕하고 적대하면, 그러잖아도 위태로운 한반도가 더욱 위태로워진다. 북한을 적으로 돌려놓고 미국·일본과만 친구 하겠다고 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외교가 아니다.
동서냉전 양극체제 시대에는 미국 하나만 믿으면 일이 풀릴 수 있었다. 그 냉전체제가 20년 전에 해체됐다. 모든 나라, 모든 지역이 각개약진하고 있다. 다들 냉철한 계산이성으로 무장하고서 국익 극대화를 도모하고 있다. 네오콘 보수이념에 젖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았던 조지 부시 행정부마저도 뒤늦게 이성을 되찾아 북-미 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꿔가고 있다. 모두 국가이익을 위해 뛰는 지금, 대한민국만 예외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꼬리치고 맹종하면 친구가 아니라 하인이 되고 만다. 친미를 넘어 숭미를 모토로 삼고 북한을 지난날의 적대관계로 돌려놓은 이 외교적 폐허에서 광우병 쇠고기 사태가 터졌고 독도 주권 문제가 터졌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다들 제 잇속 챙기는 데만 골몰해 있었음이 드러났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제 땅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 일본을 강도 높게 비난한 건 북한뿐이었다. 미국은 대한민국 이름을 슬쩍 지워버림으로써 사실상 일본을 거들었다.
좋은 친구를 사귀려면 제 중심이 튼실해야 한다. 이 정부는 숭미·반북 이념에 붙들려 국제관계의 기본축을 흔들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여섯 달 만에 한·미 정상이 세 번째 만났지만, 그 잦은 만남이 국익을 키웠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지금 대한민국 외교에는 친구는 없고 친한 척 부려먹거나 아예 등돌린 자들만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