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7.15 20:01
수정 : 2008.07.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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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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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최승호 시인의 <공장지대>가 섬뜩하게 보여주는 생태학적 상상력을 정치학적 상상력으로 치환하면, 오늘 우리 사회를 둘러친 정치적 풍경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책 없는 산업화 질주가 무뇌아 출산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였듯이, 747 헛공약과 시이오 이미지에 홀린 국민이 오늘의 무능 정권을 불렀다. 이 정권의 책임자들은 ‘보수·우익’을 자처한다. 보수라면 지켜야 할 공동체 가치가 있을 것이고, 우익이라면 제 나라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에 둘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보수도 없고 우익도 없다.
이 정부는 출범 두 달 만에 쇠고기 퍼주기 협상으로 미국에 검역주권을 내주고 국민 건강권을 포기했다. 한번 얕잡아 보이면 계속 우습게 보이는 법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 약속한 정상회담 일정조차 멋대로 거두고 바꾸었다. 6·15 선언, 10·4 선언을 휴짓조각처럼 내던졌던 이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제 국민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도 진상 파악조차 못하고 북쪽 정권의 선처만 바라고 있다. 우리의 국가원수가 꼿꼿이 선 일본 ‘천황’에게 머리 숙여 절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인데, 곧이어 그 ‘천황’의 정부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공개 선언했다. 얼마나 상대를 가볍게 보았으면, 땅을 가로채려는 야욕을 이토록 서슴없이 내보일 수 있는 건가. 제 권위를 스스로 팽개치고 타국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보수라고 말하려면 공동체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저 끔찍했던 아이엠에프 난리 이후 10년 만에 물가가 최악으로 치솟았다. 물가가 폭등하면 가장 먼저 서민의 삶이 타격받는다. 버는 것은 그대로인데 나가는 돈은 커진다. 살림이 오그라든다. 경제 살리겠다던 정부가 경제 운용을 잘못해 빚어진 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1% 부자들용 감세는 밀어붙이고 복지예산은 깎아낸다. 그러잖아도 성기기 짝이 없는 복지 그물을 아예 걷어낼 태세다.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서민의 삶을 지키지 못하는데, 보수할 것이 더 있을 리 없다. 국민은 하루 종일 머리털을 뽑아댄다.
보수도 우익도 못 되는 이 정부는 그러나, 자리와 이권을 챙기는 일에서만큼은 집요하고 끈질기고 공격적이다. 온갖 권부와 기관에 제 사람을 심으려 분투한다. 국민이 ‘고소영’을 밀어내면 예비된 또다른 ‘고소영’이 들어선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언론을 장악하는 일에 사법·행정·입법이 손발을 맞춘다. 보수·우익의 탈을 쓴 사익추구 동맹이라는 비판이 날아들 상황이다. 이들이 말한 ‘잃어버린 10년’은 단지 권력을 잃어버린 10년이었을 뿐이다. 김수영 시인은 <절망>이란 시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예언하듯 말했다. 반성을 모르는 이 정부를 국민이 불러냈으므로 다스리고 바로잡는 것도 국민의 몫이다. 김수영은 같은 시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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