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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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야, 나 신문에 나왔어!” 대학 원서 접수를 마감한 뒷날,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당시 입시는 먼저 원서를 낸 뒤 학력고사를 치러 당락을 가르는 ‘선 지원-후 시험’ 시절이었다. 으레 ‘막판 눈치작전 치열’ ‘○○대학 △△과 지원 미달’ 같은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친구는 일찌감치 원서를 썼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접수장을 종일 서성거렸다. 이런 모습이 신문사 카메라에 잡혔고, ‘막판 눈치작전’이란 사진으로 신문을 장식했다. 친구는 싸잡아 눈치 지원자가 된 데 대해 “난 소신 지원”이라며 한참을 억울해했다. 뭐, 지금의 내 생각으로도 친구는 ‘비교적’ 소신 지원에 가까웠다. 마침 초조한 표정이 눈치작전 사진으로 필요했던 기자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을 뿐이다. 새삼 옛날 일이 생각난 것은 최근 촛불시위 과격화를 둘러싸고 신문들이 저마다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서다. 지난 월요일 아침 몇몇 신문은 주말 시위대가 전경 수십명을 겹포위한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전경들의 공포는 생생했고, 이들 신문은 시위대를 선량한 시민과 분리해 ‘폭도’ ‘전문 시위꾼’라 일컬었다. 사진을 둘러싼 논란은 분분하다. 경찰이 왜 물리적 충돌로 흥분한 시위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인원 수도 밀리는 전경 부대를 뚝 끊어 투입했을까? 심지어 폭력을 유발하기 위해 떡밥을 던졌다는 해석도 나오지만, 국가 공권력이 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리라 믿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월요일 밤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에 갔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을 선량한 시민과 폭력적인 전문 시위꾼으로 분리하는 이분법이 어느새 가능해졌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시위는 사제단의 기도와 설교 이후 익숙한 거리행진으로 이어졌다. 촛불집회는 늘 그랬듯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 짧은 치마가 경쾌한 아가씨, 교복 차림의 여고생, 막 퇴근한 듯한 넥타이맨들로 붐볐다. 이들은 한동안 소리 높여 ‘명박 퇴진’ 구호를 외쳤지만, 침묵시위를 하자는 요청이 전달되면서 그저 조용히 밤길을 걸었다. 함께 걷는 수녀님들의 표정만큼이나 평화로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사실 촛불의 현장에는 늘 돌발 상황이 있었다. 집회가 비교적 평화롭게 이어지며 대통령의 ‘뼈저린 반성’을 이끌어내던 시점에도 술에 취해 난동 일보 직전이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튀어나왔다. 공권력에 막무가내 증오를 쏟아붓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촛불들은 “비폭력”을 외치며 돌발 행동을 자제시켰다. 공동선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선의가 갖는 힘이었다. 시국미사로 시작된 촛불집회에도 평화를 지탱하려는 힘은 여전했다. 을지로 입구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려는 사람에게 “비폭력” 다그침이 쏟아졌고, 거친 상황은 곧 종료됐다. 길모퉁이에선 머리가 긴 청년이 동료들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이들이 들고 있는 팻말은 “우리는 플레이(play) 시위대”라며 “(시위에서)싸우지 말고 놀자”고 호소했다.폭력 사태로 수백명이 다치고 피를 흘렸던 지난주말 집회에 참석한 촛불과 이날 밤의 촛불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을까? 주말에만 특별히 음험한 무리들이 집결했던 것일까? 나는 거리를 흐르는 촛불 속에서 ‘폭도’와 ‘플레이 시위대’를 손쉽게 가르기 어려웠다. 촛불 행렬엔 분명 가지가지 사람들이 섞여 있겠지만, 이들을 평화로 묶어내는 힘은 촛불 속에서 여전히 사위지 않고 있었다. 몇몇 신문의 도드라진 ‘폭력 촛불’ 사진을 보면서 싸잡아 ‘눈치 수험생’으로 몰렸던 친구가 문득 생각났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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