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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6 20:30 수정 : 2008.06.26 20:30

정태우 편집1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그때껏 서울에서 내가 보아 왔던 반장들은 하나같이 힘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물게 힘까지 센 아이가 있어도, 그걸로 아이들을 억누르거나 부리려고 드는 법은 거의 없었다. 다음 선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런 걸 참아 주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전혀 새로운 성질의 반장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책에 실려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 주인공 한병태는 교실 안의 절대 권력자인 엄석대를 향해 “반장이 부르면 다야? 반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을 쓴 이문열씨는 잘못된 쇠고기 협상과 권력을 감싸 온 언론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향해 ‘촛불장난’ ‘집단난동’이라며 언어의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다. 그의 대중 폄하와 시민운동에 대한 적대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공영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발언을 들으면 독재국가의 언론관이 떠올라 섬뜩해진다. 작품 속 주인공보다 못한 작가의 언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입맛이 쓰기만 하다.

아이들의 반장 선거부터 어른들의 대통령 선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선거는 권력의 위임을 낳는다. 소중한 표를 행사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뽑힌 자들이 뽑아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 때다.

정부의 쇠고기 고시 강행과 촛불에 대한 초강경 대처가 결국 유혈을 불렀다.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50대 남성의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이게 민주정부인가. 국민들은 10년 만에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방패로 내려찍는 참 사나운 정권을 만났다. 뼈저린 반성을 했다는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후 고시 강행까지 벌어진 양상을 보면,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뒤로는 촛불을 끄려는 대반격을 잔뜩 준비해온 듯하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울 때는 보수 지식인들이 나서 포퓰리즘으로 비난하더니, 약간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자 정부와 한나라당이 나서 ‘국가 정체성 도전’ ‘반미투쟁’이라는 상투적인 색깔론을 덧씌우고 있다.

이제 촛불을 내리고 대의민주주의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국민의 뜻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거리에 나온 것이다. 시위 진압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군복무 전환에 대한 행정심판을 청구한 전경을 영창에 가두는 데서 보는 것처럼 공공기구에 존재하는 민주주의 작동 기제 역시 여전히 취약하다. 거리와 광장에서 표출된 민의를 수렴할 책임은 청와대와 국회에 있다. 정부가 중요한 정책결정을 할 때, 사전 의견 수렴도 사후 비판 경청도 안 하면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더 커갈 수밖에 없다. 위임받은 권력이 민의를 컨테이너로 막고, 국민을 배제하고 억압할수록 촛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을 것이다.

쇠고기 협상과 추가협상 그리고 고시 강행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줄곧 국민과 소통하겠다면서도 국민과의 대화는 외면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분노가 식지 않고 타오르는 이유다. 정부가 진정 국민을 섬기겠다면, 지금이라도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쇠고기 해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도 정부와 국민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처럼 추가협상이 90점짜리이고,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처럼 “촛불시위 참가자 중 10%가 일반 시민이고 나머지는 ‘프로’들”이라면 국민투표를 거부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정태우 편집1팀 기자windage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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