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24 19:43
수정 : 2008.06.24 19:43
|
고명섭 책·지성팀장
|
한겨레프리즘
힘이라고 해서 다 같은 힘이 아니다. 능동적인 힘이 있는가 하면 반동적인 힘도 있다. 가볍고 맑고 환한, 탄성을 품은 힘은 튀어오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둡고 습하고 탁한, 소성을 품은 힘은 짓누르고 거꾸로 돌아간다.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이 두 힘이 부딪치는 곳에 놓일 때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능동적 힘이 뿜어내는 권력의지는 창조적이며 해방적이다. 삶을 자유롭게 한다. 반동적 힘으로 뭉친 권력의지는 억압하고 제약한다. 삶의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능동적 힘의 발현은 반드시 반동적 힘을 부른다.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다. 지금, 도처에서 반동적 힘들이 복귀하고 있다. 해질녘 땅거미처럼 다가와 뻗어오르고 날아오르려는 힘들의 발목을 붙들고 넘어뜨린다. 흐린 공기가 오히려 편한 이 힘들은 자유의 기운을 봄날의 황사보다 더 두려워한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작심한 듯 쏟아놓은 말은 그 반동적 힘의 발생지점을 보여준다. 촛불을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라고 했던 그는 서둘러 그 말을 주워 담았다. 촛불을 ‘불장난’이라고 하더니 이어 ‘내란에 준하는 난동’이라고 낙인찍었다. 그러면서 ‘의병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 의병이란 말이 그가 즐겨 쓰던 비난의 수사 ‘홍위병’을 비틀어놓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외적의 침탈에 대항한 거병이 아니었다. 지난날 엘피지 가스통에 불을 붙여 세종로를 난장으로 만들었던 북파공작원들, 한겨레신문사에 뛰어들어와 책상을 뒤엎고 컴퓨터를 때려 부수던 고엽제전우회 사람들이었다. 지독한 억압의 시대 내내 자기 존재를 증명받지 못하고 고엽제로 인한 질병에 고통받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 시대의 희생자들이 난데없이 의병의 겉옷을 입고 반동적 힘에 복무하고 있다. 홀로 시위하던 쉰 살 여성을 집단으로 패 중상을 입힌 것이 의병들의 거사였다. 이문열씨의 모든 말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바깥으로 돌린 전형적인 ‘투사’ 행위다. 난동을 벌이는 것은 촛불이 아니라 의병이다.
능동적 힘의 전진을 막아보려는 탁한 힘들의 반작용 방식은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온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발언에서도 날것으로 드러났다. 그 의원은 공안검사 출신이라는 이력을 자랑하듯 토론회 말미에 고려대 학생 김지윤씨가 고려대 학생이 아니라고 ‘폭로’했다. 생기 넘치는 날렵한 논리로 국무총리를 추궁해 ‘김다르크’라는 별명은 얻은 김지윤씨는 한순간에 자기 신분을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 신원을 일부러 추적할 정도의 집요함이라면, 그 당사자가 현재 고려대 학생임을 확인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 의원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진실이 아닌 허위로써 한 젊은이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을 모독했다. 그러고도 득의양양했던 그의 표정이야말로 반작용하는 힘의 실상을 보여준다.
촛불은 능동적 힘이 어떻게 타오르는지 보여준다. 인터넷과 광화문을 빛의 바다로 만들었던 촛불은 이제 국민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마음속에 사람들은 촛불을 켰다. 니체는 우리 정신이 낙타가 되고 사자가 되고 마침내 아이가 된다고 말한다. 낙타는 삶의 짐을 지고 터벅터벅 사막을 건넌다. 사자는 부당하게 진 짐을 털어버리고 그 짐을 강요한 자들을 향해 포효한다. 그리고 아이는 놀이를 한다. 삶을 즐기면서 유희를 벌인다. 아이가 된 정신은 낙타도 사자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노고를 묵묵히 감당하되 부당한 짐을 거부하고,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향유한다. 지금 낙타이고 사자이고 아이인 주권자 국민이 반작용하는 힘들을 향해 명령한다. 멈추어라!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