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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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지난 20년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 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책임을 다 지겠습니다.” 지난 12일 이건희 회장이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13년 만에 다시 피고인석에 섰다. 현명관 회장,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 다른 삼성 수뇌부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모두들 반성과 죄송이라는 말과 함께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 회장이 발언 도중 울먹거릴 때는 주위가 숙연해졌다. 그러나 방청석은 곧 당혹감에 빠졌다. 변호인들은 특검에서 기소한 혐의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구조조정본부가 경영권 세습을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을 주도한 혐의를 부인하는 대목에서는, ‘삼성 봐주기’ 지적을 받았던 조준웅 특검조차 “수사받을 때와 왜 말이 바뀌었느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행선은 18일의 2차 재판에서도 장장 8시간이나 이어졌다. 이제 국민은 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 회장은 4월22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경영 퇴진을 선언했다. 그룹 사령탑인 전략기획실은 해체되고, 핵심 임원들이 퇴진하는 쇄신안이 발표됐다. 만약 삼성 수뇌부들이 무죄라고 생각했다면, 대국민 사과와 경영 퇴진은 왜 했을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비자금, 차명계좌와 주식, 경영권 세습, 정관계 로비 등 숱한 의혹이 제기됐다. 특검에 의해 일부는 혐의가 드러나고, 일부는 의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회장이 국민의 예상을 뛰어넘는 쇄신안을 내놓은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지겠다는 결단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쇄신을 통해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로 해석됐다. 많은 국민들은 “이제 삼성이 제대로 바뀌는 모양”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그러나 삼성 수뇌부가 재판에서 보인 모습은 이런 기대와 믿음을 뿌리째 흔들었다. 실형의 위험 앞에서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국민 사과와 경영 퇴진에 진정성이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삼성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국민과 글로벌 사회로부터 신뢰를 되찾는 일이다. 혐의를 무조건 부인하는 태도는 이미 발표된 쇄신책의 취지마저 퇴색시킬 수 있다. 혹시 삼성 수뇌부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여론재판으로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 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는 단순히 윤리적 가치를 뛰어넘어 사회적 자본으로서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번영을 가져오는 필수요소”라고 강조했다. 국가와 기업 모두 마찬가지다. 정부의 신뢰 상실이 그 어떤 정책 실패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잘 보여준다. 대통령은 입으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추진 등 불도저식 국정운영을 반성하고, 국민과의 소통 실패를 인정했다. 하지만 몸으로는 여전히 검찰·국세청까지 동원해 방송장악과 여론통제를 꾀하고 있다. 이런 터에 대국민 사과를 다시 하고, 청와대 비서진과 장관을 바꾼다고 신뢰가 회복될 리 만무하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시가총액 1조원의 삼성을 21년 만에 140조원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그러나 신뢰를 잃는 순간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회장이 보여줘야 할 것은 무죄를 위한 강변이 아니라, 국민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이 회장이 재판에서는 이기되 신뢰를 되찾는 데 실패한다면 소탐대실이다.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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