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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10 19:08 수정 : 2008.06.11 02:07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저녁을 먹고, 땅거미가 내리는 서울광장으로 간다. ‘다함께’ ‘○○ 노조’ 같은 이른바 운동권 깃발 사이로 ‘선영아 모여라’ ‘다음 아고라’ 같은 누리꾼 깃발들이 사뿐하게 나부낀다. 자유 발언이 이어지고, 배고픈 촛불들에게는 일명 ‘배후 김밥’도 넉넉히 돌아간다.

짙어진 어둠만큼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면 거리행진을 시작할 시간. 광장 촛불들이 거리로 흐르기 시작한다. 친구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때로는 깃발끼리 수십명씩 따로 또 같이 밀려간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어청수를 구속하라, 구속하라~” 훌라송에 맞춘 구호가 몇 차례 돌고 나면, 불타 버린 숭례문 앞에 도착한다. “지못미! 남대문!” 입을 모아 외치는 촛불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남대문’이란 뜻이다. 단란한 촛불 부부도 남대문을 가리키며 무어라 무어라 아이를 가르친다.

남대문로를 지나 한국은행 쪽으로 향하는데 이번엔 우스개 구호들이 터져 나온다. “물대포로 비데써라, 비데써라~” “이메가를 포맷하라, 포맷하라~” 앞서 가는 촛불의 등에는 영어 몰입교육을 내세우곤 우리말 맞춤법은 틀렸던 대통령을 비꼬는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멈춰선 버스를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구호, “민주시민 함께해요~” 버스에 탄 까까머리 청년이 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박박 깎은 머리를 가리켜 보인다. 촛불들이 바로 호응해서 외친다. “제대해!” “제대해!” 청년이 환하게 웃는다. 아마도 ‘휴가 나온 군인이라 곤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깃발들 사이로 가족과 연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이고 촛불은 조계사 앞길을 거쳐 안국 네거리에 이른다. 이제 청와대로 이어지는 길목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다. 촛불이 멈춰 서야 할 곳이다.

정부는 두터운 벽을 쌓았지만 촛불들은 바리케이드 벽면에 청와대를 향한 메시지를 빽빽이 써 내려갔다. 촛불의 방명록이 돼버린 바리케이드는 ‘의료 민영화 반대’ ‘대운하 중단’ ‘친일 교과서 웬 말’ 등 쇠고기 고시 이외의 각종 정부 정책 비판과 우려 메시지로 가득하다.

10일 세종로와 안국 네거리에는 전경버스 대신 컨테이너 박스가 새 바리케이드로 등장했다. 항만에서나 보던 집채만 한 쇳덩어리들이다. 가까운 인천항에서 경찰이 가져 왔다고 하는데, 거대한 촛불의 파고가 행여 전경버스 위로 넘쳐 청와대로 밀려들까 고심했던 흔적이 안쓰럽다.


사실 촛불이 두려워 전경버스 뒤로, 컨테이너 뒤로 숨어야 하는 대통령은 더 안타깝다. 취임 100여일 만에 동네북 신세와 다를 바가 없다. 아빠 목말을 탄 어린아이가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명박은 물러가라” 구호를 따라 외칠 때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정말로 안쓰러운 것은 촛불들이다. 해야 할 공부도 넘쳐나고, 취업 채비도 바쁜 이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은 일만 하기에도 피곤하다. 이들은 집으로, 일터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촛불을 들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지요?” “국민이오!”

“머슴은 누구입니까?” “대통령이오!”

“머슴이 주인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광장의 자유 발언대에서 이어진 질의 응답이다. 앞의 두 질문에 대한 화답은 한목소리로 터져나왔지만, 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각기 흩어졌다. 머슴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촛불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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