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03 19:36
수정 : 2008.06.03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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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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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청와대를 저만치 두고 광화문 앞에서 수만명의 시민과 중무장한 공권력이 대치했다. 세종로 그 큰길을 좌우로 틀어막은 전경버스는 불통과 폐색과 단절의 상징물이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아무리 애타게 호소해도 버스로 둘러친 장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참다 못한 시민들은 장벽을 밀어붙이고 기어오른다. 불통이 된 권력은 그 안간힘을 향해 할론 소화기를 분사하고 물대포를 쏜다. 방패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짓이긴다. 그러나 폭력이 커질수록 권력은 약해진다.
살아 있는 권력은 영향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영향받을 줄 아는 권력만이 살아 있다. 들뢰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그는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을 수 있다.” 영향을 줄 생각만 하고 영향을 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는 권력은 그러므로 무능한 권력이다. 입력된 프로그램의 명령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와도 같아서 망가지고 난 다음에야 멈춘다.
한의학에서 쓰는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인체의 마비를 가리킨다. 인(仁)이 없는 상태, 느낄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상태, 요컨대, 감수성이 말라붙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불인이다. 어질지 못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불도저에게 앞에 놓인 모든 것은 장애물일 뿐이다. 건물을 부수고 땅을 파헤치는 데 익숙한 불도저는 밀고 나가면 되는 줄 안다. 그것은 추진력이 아니라 무사유다. 현명한 스피노자는 말한다. “가장 큰 오만은 가장 큰 무지이며 가장 큰 무능이다.”
권력은 태풍과 같아서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을 때만 권력이다. 후끈거리는 대양의 열기와 습기를 빨아들이며 태풍은 힘을 키운다. 그러나 바다를 잃어버린 순간 태풍은 열대성저기압으로 변해 흩어지고 만다. 지금 민심의 대양은 인터넷에 떠 있다. 그런데도 낡은 관념에 붙들린 이 정부는 권부의 요직에 자기 식구를 앉히면 되는 줄 안다. 방송을 장악하고 신문을 들러리 세우고 사정기관을 틀어쥐면 일사천리일 줄 안다. 국민의 마음을 내다버린 권력기관은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껍데기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또 이런 말을 한다. “대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대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겸손과 후회와 외경을 그토록 장려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그 대중을 위해 <에티카> 뒤편에 이런 말을 써 놓았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가장 유익하고 가장 끈끈한 우애로 결합한다. 그들은 똑같은 사랑의 노력으로 서로 친절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한다.”
촛불을 나눠 켜고 우비를 나눠 쓰고 김밥을 나눠 먹으며 불인의 권력과 맞서는 대중이야말로 우애의 공동체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인사도 하기 전에 벌써 오랜 친구가 되는 만남, 그 자유인들의 공동체야말로 현실로 나타난 이상이다. 반면에 낡은 권력의 장벽 뒤에서, 이 시련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야말로 허망한 권력에 사로잡힌 예속인이다. 광화문의 대치는 자유인 대 예속인의 대치다. 정부가 마지못해 ‘쇠고기 고시 연기’를 발표한 것은 말하자면, 시민들의 힘으로 전경 버스 몇 대가 끌려 나온 것과 같다. 그 버스들이, 장벽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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