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7 19:33
수정 : 2008.05.2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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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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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특별히 인간에게서 그렇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다른 존재의 감정·의견·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공감이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느낀다는 한자 뜻처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선조들, 특히 우리 조상들은 공감이 발달한 이들이었다. 씨앗을 심을 때 한 곳에 두 개씩 더 심어 새와 땅벌레가 하나씩 가져가도록 했고, 흙 속에 깃들어 사는 온갖 종류의 벌레와 미생물이 다칠까 뜨거운 물은 식혀서 마당에 버리던 사람들이었다. 날짐승은 물론 땅벌레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생물들도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집을 팔고 사는 거래를 할 때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집이 들을까 우려해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공감 능력을 잃었다. 닭의 살처분에서 알 수 있다. 올해 살처분된 닭은 700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단군 이래 이처럼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양계 농가에 보상금을 주고 닭고기 소비를 촉구하는 캠페인이 벌어지지만 자신의 생명을 바쳐 돈을 벌게 해주는 닭에 대한 공감은 없다. 일부 전문가나 동물보호단체는 닭은 물론이고 돼지나 소 등이 쉽게 병에 걸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좁은 공간에 많은 수를 가둬서 키우는 것을 든다. 실제 상당수의 양계장에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높은 밀도로 닭을 키운다. 또 많은 양계장에서 밀도가 너무 높아 스트레스를 받은 닭이 서로를 쪼지 않을까 우려해 병아리 때 부리를 자른다. 병을 막기 위해 항생제를, 빨리 키우기 위해 성장촉진제를 먹인다.
공감의 상실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대륙에서 수백만명이 굶어 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가까운 북녘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십년 만에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기상관측 이래 처음’ 있는 기상이변이 닥쳐도 그뿐이다. 태풍이나 지진의 숫자와 강도가 해마다 증가해도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간다.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나 중국 쓰촨성에서 발생한 강진이 자신의 삶터를 덮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적다.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소득을 올리기 위한 ‘개발’이 수만에서 수십만명이 떼죽음 당하는 천재지변을 가져오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다. 5월에 한여름 더위가 찾아와도 에어컨을 켜면 그뿐이다.
지난해 11월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에서 2030년에 북극 빙하가 모두 사라진다는 발표가 나온 지 바로 한 달 뒤에 미 항공우주국(NASA)은 그보다 18년이 앞당겨진 2012년에 북극의 얼음이 다 녹을 것이라는 소름 끼치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지구촌의 어느 나라도 긴장하지 않는다. 꿀벌이 사라지는 군집 붕괴 현상이 생물 멸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 이들은 적다.
이런 경고에 대해 ‘다 같이 죽을 텐데 뭐가 걱정이냐’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처구니가 없다. 길을 가다 아이들을 만나면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인류가 물이 끓어오를 줄도 모르고 가마솥 안에서 편히 쉬고 있는 개구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공감이 없으면 쓰촨성의 지진을 예측하고 빠져나온 두꺼비만 못한 동물이 된다.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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