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
한겨레프리즘
교사가 여고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대는 학교를 졸업했다. 심지어 어느 교사가 학생 귀를 너무 심하게 잡아당겨 귀가 찢어졌다는 괴소문이 나돌았을 때도, 아이들은 “(그 교사라면) 그러고도 남는다”며 수군거렸다. 알고 보니 찢어졌던 건 아니고 귀끝 혈관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머리와 뒷머리 끝을 둥글게 마는 파마가 유행하자, 교문 앞엔 수돗물을 뒤집어쓰고 우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드라이로 앞머리를 마는 건 괜찮았지만 파마는 금지돼 있었다. 집에서 드라이를 했다고 우기면 수돗가로 끌고 갔다. 파마 머리는 물에 적시면 티가 났기 때문이다. 0교시는 당연했다. 아침 7시 이전에 시작했던 자습을 생각하면 ‘마이너스 1교시’를 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특별 자습실 기억도 생생하다. 한 반에서 5~6등까지 드나들었는데, 여름엔 에어컨이 설치됐다. 나머지는 선풍기만 돌아가는 교실에서 ‘야자’를 했다. 감독 교사는 아이들이 도망을 못 가도록 복도문을 걸어 잠갔다가 화장실 갈 시간에만 열어주기도 했다. 2학년 때인가는 옆 학교에 성적 비관 자살자가 나왔다. 우리 학교에도 자살한 귀신이 자주색 교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여고괴담’이 다시 한번 떠돌았다. 그때 아이들은 때리면 그냥 맞고 울었다. 고3 때 무슨 일엔가, 항의 뜻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단체 행동을 한번 했다. 평소 실내화로 아이들 뺨을 때리던 교사가 한달음에 달려왔고, 아이들은 공포심에 얼어붙었다. “다 너희 대학 잘 가라고 하는 일”이란 일장 훈계만으로 사태가 마무리됐을 때 아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당하지 않은 폭력과 권위에도 그저 주눅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1998년 공포영화 <여고괴담>이 개봉했을 때 정말 ‘실감나게’ 영화를 봤다. 영화가 ‘입시 교육’과 ‘나쁜 교사’가 군림하는 잔혹한 학교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여고괴담의 현장을 거쳐온 관객들은 열광했고, 나 역시 그런 관객의 하나였다. ‘여고괴담’ 이후 10년, 학교는 그래도 많이 변했다. 아이들은 두발 자유화, 체벌 금지, 0교시 폐지 등을 놓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권위에 무조건 주눅 들지 않았다. 인적 드문 학교 복도나 교실을 배회하는 여고괴담의 유령들이 잠시 봉인되는가도 싶었다.그런데 어느 순간 여고괴담의 유령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느낌이다. 학교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운다는 얘기가 나오고, 0교시·우열반·성적순 특별 자습실 부활 소식도 새삼 들려온다. 아이들을 설득과 토론 대신 윽박질러 복종시키려는 행태도 보란 듯하다. 촛불집회 초반에 경찰 투입 얘기가 나오기에, “차라리 ‘학생 주임 샘’을 풀어~” 농담을 했더니 정말 그렇게 한다. “입시나 취업에 불이익을 준다고 엄포를 놓지 그래?” 농담을 했더니, 벌써 그런 위협적인 교내방송도 돌았던 모양이다. 정작 아이들은 달라졌다. 촛불집회에 한번만 나가 보면 달라진 아이들이 보인다. 이들에게 학생 인권 운동과 학교 일상의 민주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샘~ 우리 잡으러 온 김에, 함께 촛불 들어요”라고 적힌 손팻말을 치켜들 만큼 발랄하다. 정부는 이들을 상대로 10년 전 ‘여고괴담’을 재개봉할 셈일까? 아이들은 현실이든 영화든 철 지난 여고괴담의 귀환을 반기지 않을 듯하다. 합리와 소통을 이미 경험한 세대를 불합리와 권위주의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진짜 괴담이다.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seraj@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