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24 23:17
수정 : 2008.04.24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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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우 편집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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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인천지하철 부평구청역 3번 출구 옆 지상 25m 0.6평짜리 공간. 잠깐 올려다봐도 아찔한 철탑에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지엠대우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가 터져 나온다. 한 사람은 그곳에서 시린 겨울을 보냈고, 또 한 사람은 잔인한 봄을 견디고 있다. 회사 서문 앞에선 또다른 노동자가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오늘로 120일을 넘긴 고공농성과 18일째 이어온 단식. 원청업체인 지엠대우차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고, 정부도 이렇다 할 중재 노력이 없다. 대화를 기다리는 이곳엔 철거 위협과 벌금 고지서가 날아든다.
지엠대우차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찾아가 노사 화합의 상징으로 치켜세운 곳이다. 비정규직의 철탑 농성장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비즈니스 프렌들리’. 그는 이번 미·일 방문에서 “나는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시이오(최고경영자)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친기업’을 넘은 ‘국가의 기업화’ 선언이라 할 만하다. 외국인 투자자들한테 박수를 받은 발언 뒤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300일을 넘긴 이랜드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에 대해 노동부 장관은 ‘노사 자율로 해결해야 한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학교도 자율화하겠다’며 0교시-우열반을 허용해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몬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건강보험을 민간의보로 바꿔 가겠다고 말한다. 고공철탑 위 비좁은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동자, 등수 공개 압박감에 모의고사를 잘못 봤다며 몸을 던지는 아이, ‘손가락이 잘려도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지 못하는’ 영화 <식코> 장면처럼 의료비 부담에 가슴을 졸이는 환자들.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풍경이다. 경쟁과 시장화라는 구호 아래 사회 공공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정부는 국민 섬기기보다 기업에 대한 봉사를 우선시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쟁력 없는 건 희생돼도 어쩔 수 없다는 섬뜩한 맹신이 퍼져간다. 사회적 약자는 ‘다수의 이익이 먼저’라는 이데올로기 앞에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런 모습은 국민과 소통 없는 통상정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위해 광우병 위험까지 수입하는가’라는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미국산 쇠고기가) 마음에 안 들면 적게 사면 된다”라는 대한민국 최고경영자의 소신이다. 정부는 국회에 비준동의를 조속히 해 달라고 압박할 뿐 보완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대답이 없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마저 “정부는 대책을 내놓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최대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들의 절박한 호소는 ‘희생 불가피론’에 묻힌다. 함께 대책을 고민해 주길 바라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번번이 배신당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공성을 지키는 건 정부가 할 일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무책임을 자율로 포장하는 이명박 정부. “(국가의) 기업화는 대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론을 조종하며, 세상의 운영방법에 대한 기본적 결정권을 소수 권력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촘스키의 저서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에 실린 경고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에서 졸지에 대한민국 종업원으로 바뀌어 버린 듯한 지금,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묻는다. 국민이 낸 세금을 쓰면서 정부를 기업처럼 운영해도 되는가?
정태우windage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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