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22 22:06
수정 : 2008.04.22 22:08
|
고명섭/책·지성팀장
|
한겨레프리즘
정치의 영토에서 진리를 추방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와 진리는 섞여 앉으면 둘 중 하나가 죽는 상극이다.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독배를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무력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정치는 진리를 실현하는 장이 아니라 진리를 죽이는 장이다. 반대로 진리가 정치를 장악했을 때 ‘진리의 폭정’이 시작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런저런 의견들은 진리의 눈으로 보면 무가치하다. 이 의견들을 쳐내고 제압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의 독재다. 어떤 경우든 진리는 정치와 화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와 가족유사성 관계에 있는 윤리는 어떨까. 진리를 추방한 아렌트도 ‘진실성’을 추방하진 못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 정치적 효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길게 보면 끝내 진실성의 힘을 이기진 못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진실성을 포함한 윤리는 정치를 정치답게 만들어주는 필수 조건이다. 아렌트의 이런 견해를 욕망의 문제로 풀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윤리적 욕망도 있다. 물질적 향유를 넘어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높이고 누리려는 욕망도 있다. 정치의 장에서도 이 욕망이 작동한다.
지난 몇년의 한국 정치는 바로 이 윤리적 욕망을 한없이 부추겼다가 끝없이 좌절시킨 과정이었다. 참여정부의 탄생은 이 윤리적 욕망의 한 극점이었다. 윤리적으로 하자 많은 후보를 제치고 또 ‘후보 단일화’ 약속을 선거 직전 파기한 비윤리적 일탈을 딛고 탄생한 것이 참여정부였다. 승리의 감격에는 윤리적으로 성숙한 정치에 대한 짙은 열망이 담겨 있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이 열망은 쉼없이 주저앉고 찌그러졌다.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살해될 때, 대통령 핵심 측근은 “사람 한 명 잡혀갔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냉정하게 무시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참수 장면을 보면서 국민은 깊은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국가가, 정치가 그 외상을 돌봐주기는커녕 되레 덧냈다. 윤리적 좌절감이 번졌다. 정권 초기 거셌던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은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1년 뒤 대통령은 야당에게 연정을 제안하는 폭탄 선언을 했다. 태생 자체가 반윤리적인 정당을 향해 동거하자고 내민 구애의 손은 참여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의 윤리 감각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윤리적 허무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다. 이후 선거가 윤리의 제어를 받지 못하는 물질적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은 윤리적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후보를 눈 딱 감고 대통령으로 뽑았다. 새 정부 인사들의 윤리적 결격조차 대부분 용인했다. 지난 4·9총선은 그 대선판도의 재연이었다. 집값 상승 기대로 서울 시민들은 ‘뉴타운 사기공약’에 몰표를 던졌다. 지난 정권 시기에 윤리적 트라우마를 깊게 입은 사람들은 투표장을 외면했다.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여당 유력 정치인의 말이 유사-윤리적 쟁점을 이루었을 뿐이다. 통합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보권은 이 쟁점 바깥에서 맴돌았다. 지난 총선은 우리 정치의 윤리적 욕망의 한 저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민의 이번 선택이 조만간 회복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결과인지 아니면 향후 한국 정치를 규정할 구조적 조건을 보여준 것인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사람 하기 나름이다. 국민이 각성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민주·진보파 정치가 각성해야 한다
고명섭/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