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3.27 19:40
수정 : 2008.03.2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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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수/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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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삼성 이학수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특검에서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로의 불법승계를 주도한 혐의를 일부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수천개의 차명계좌 확인이나 떡값로비 증언에도 아랑곳 않던 그로서는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이학수가 누구인가? 삼성 사령탑인 구조조정본부장을 11년째 맡아 온, 삼성의 2인자다. 그의 태도 변화에서는 이번 사건의 법적 책임을 자기 선에서 마무리짓겠다는 뜻이 읽힌다.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실형까지 각오하는 게 상식이다.
때마침 이명박 대통령도 한마디 했다. “(특검이) 삼성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국민이 바라는 일이다. 삼성에 전화위복이 되려면, 지난 10여년 발목을 잡아 온 문제들을 솔직히 털고 가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구도 다시 문제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솔직히 잘못을 고백하고 책임지는 자세, 그리고 새로운 삼성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3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삼성 입사 37년째로, 환갑까지 넘긴 그로서는 힘든 결단이었을 것이다. 자기 밑에서 승계작업을 실행하며 그 공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김인주 사장의 책임까지 뒤집어쓰는 모습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개운찮다. 무엇보다 총수인 이건희 회장의 사과와 책임지는 모습이 안 보인다. 이 회장이 이 부회장을 ‘방패막이’로 쓴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98년 세풍, 2003년 불법 대선자금, 04년 삼성에버랜드, 05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 이어 벌써 다섯 번째다. 이 회장의 분명한 태도는 새 삼성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가장 확실한 잣대가 된다.
“삼성 편법 대물림 구조본이 주도”, 07년 5월25일치 <한겨레> 1면 기사다.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된 이 기사에는 이 부회장이 2000년 말 구조본 회의에서 에버랜드 사건 주도 사실을 시인했고,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도 “나중에 괜찮겠냐”며 걱정했다는 전직 임원의 증언이 담겨 있다. 모두 아는 일을 정작 이 회장만 몰랐다는 말은,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다. 특검이 부실수사라는 지적을 받는 것도 삼성의 말에만 기댄 채 사건 종결을 서두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특검이 끝나도 미진한 부분은 검찰에서 계속 수사하도록 하겠다고 벼른다. 삼성이 설령 특검이나 권력과 타협을 했대도, 편법과 임기응변은 새 불씨를 남길 뿐이다.
06년 삼성의 2·7 대국민 사과는 좋은 교훈거리다. “과거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과 함께 삼성에 대해 지적해 왔던 점을 받아들여 … 믿음과 희망을 주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이 부회장은 기자에게 “이번엔 믿어달라”고 다짐까지 했다. 삼성이 진정으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혁신 노력을 했다면, 이번 사태가 터졌을까?
이 부회장은 퇴진 시기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지금 그만두면 속편하다. 재산도 수백억 있다. 하지만 이건회 회장에게 미안하다. 재용씨가 국민의 축복 속에 경영권을 승계하도록 하는 게 나의 마지막 사명이다.” 그러나 특검이 의혹 속에서 끝나면 그 사명을 이룰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03년 에스케이 분식회계 사건이나 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은 타산지석이다. 최태원 회장과 정몽구 회장은 직접 책임진 뒤, 변화를 약속하며 위기를 정면돌파했다. 진실을 털어놓고 새로운 삼성을 다짐하면서, 선처를 호소하는 게 옳은 태도다. 누군가 이건희 회장에게 이를 고언해야 한다. 한 삼성임원은 이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비유했다. 지금 방울을 달지 않으면 ‘삼성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곽정수/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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