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라/사회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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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영어’ 때문에 대한민국이 시끄럽다. 돌이켜 보니 영어 광풍이 몰아치기 전야에 대학을 다녔다. 대통령의 입에서 ‘세계화’란 단어가 처음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배낭여행이 유행했고, 눈치 빠른 친구들은 어학연수를 떠났다. 대학들은 우후죽순 국제대학원 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래도 영어 스트레스는 한참 덜했다. ‘이태백’ 세대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어쨌든 그때도 취업용 영어 점수는 필요했다. 토익 도사들은 시험장을 매달 들락거리면 문제가 쉬운 ‘대박 달’을 만난다고 일러줬다. 예언대로 어느 날 대박 달이 도래했고, 얼추 취업 원서에 쓸 만한 토익 점수를 만들었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너도나도 ‘샐러던트’(샐러리맨+스튜던트)를 들먹였다.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는데 영어 회화가 대세였다. 뉴토익에는 말하기 시험이 추가됐고, 영어면접에 익숙한 후배들이 줄을 이었다. 영어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이태백 세대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요즘 세상에 영어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툭하면 들이대는 경쟁력 잣대라는 게 영어 구사 능력이다. 어떤 구청은 어설픈 영어로 정기 간부회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어떤 공무원은 승진 심사에 위조된 토익 성적표를 냈다가 파면에 사법처리까지 당했다. 이러니 자식의 조기 영어교육에 매달리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다. 경쟁력을 재는 잣대로 영어가 그토록 쓸 만한가? 모두가 경쟁력을 외치는데, 잣대가 영 어설프다.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려면 평가자의 역량과 책임이 우선이다. 평가자가 그 자리, 그 직무, 그 공부에 필요한 인재상을 그려내고, 맞춤한 사람을 뽑거나 교육하면 될 일이다. 옷을 잘 입으려면 잘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옷의 원단·색감·디자인이 두루 좋은 옷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누가 옷을 입을 거냐, 어느 옷과 맞춰 입을 거냐, 어느 자리에 입고 갈 거냐에 따라 좋은 옷은 달라진다. 이를 알아보는 게 ‘패션 감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평가 권력들은 도무지 이런 감각이 떨어진다. 한때는 대학 간판을, 이제는 영어를 획일적 잣대로 맹종한다.새벽 별을 보며 영어학원 문턱을 밟고, 가족이 생이별을 해가며 영어를 배우러 외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어렵게 배운 영어는 ‘쓸모’라기보다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을 줄 세우는 ‘번호표’에 가깝다. 실제로 얼마나 영어가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없는 일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가기 위해 앞 번호에 서야 한다. 이런 우리끼리 경쟁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대통령직 인수위는 이런 영어 스트레스를 덜어주겠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꺼내든 카드가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이란다. 콩나물 교실에서 영어로 입 뗄 기회가 얼마나 될까. 값비싼 학원에서 7~10명씩 수업을 해도 영어는 쉬이 늘지 않는다. 핵심은 영어 말하기가 학생을 ‘한줄 세우기’에 급급한 대학 입시의 새 잣대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국민이 영어를 ‘말’해야 할 등짐을 지게 됐다. 소득과 교육 수준이 낮은 부모를 둔 ‘개천의 용’한테는 특히나 버거운 짐이다. 글로벌화와 함께 영어가 필요한 분야가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모든 국민이 영어를 말해야 하나. 영어가 경쟁력을 재는 유일무이한 잣대일까. ‘대학 간판’에 더해 ‘영어 간판’도 따야 한다니 푸념만 길어진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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