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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03 19:12 수정 : 2008.01.03 19:12

손준현/편집선임기자

한겨레프리즘

지하철역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시던 그 익숙한 곳은 일순간 낯선 공간이 되어 나를 포위하고 압박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히 역에서 내렸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집에 전화를 걸어 다급히 구조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모르겠어’뿐이었다. 늘 다니던 1번 출구 대신 엉뚱한 6번 출구로 나왔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고래들이 바닷가에서 떼죽음하는 경우도 잦다. 지도자 고래의 그릇된 안내 때문이라든가, 집단적으로 초음파가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어떤 게 원인이든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통합신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이 진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04년 5월 민노당의 지지율은 21.9%였다. 4·15 총선에서 처음으로 원내 진출을 이룬 직후였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43.5%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22.3%의 한나라당을 턱밑까지 따라붙을 만큼 진보 정치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등원 한 달 뒤 진보정치의 한계를 느낀 것은 국민들보다 의원들이 먼저였다. 권영길 의원은 본회의 질의자로 뽑혔다가 한나라당의 반대로 취소되는 수모를 겪었다. 조승수 의원은 “국회 활동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며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은 “전문성 부족으로 공세적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농성장과 시위장으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졌다. 보수정당의 틈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법안 발의뿐이라는 자조도 나왔다.

때로 부분이 전체를 보여주고, 잘라낸 한 면이 그 물체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원내 진출 한달 뒤의 그 자괴감은 바로 지난해 말 대선 참패를 예고한 듯하다.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득표율은 3%였다. 양자구도로 치러진 그 전 대선 때는 원외 정당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권영길 찍으면 이회창 된다’는 사표 방지 심리에도 불구하고 3.9%의 득표를 올렸다. 엄청난 추락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진보적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사라진 것인가. <한겨레>의 새해 국민의식 조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국민의 67%는 아직도 사회복지가 잘 갖춰진 사회를 꿈꾼다. 20대의 66%는 “대안정당이 없다”는 말로 새로운 정당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숨기지 않는다. 문제는 좀더 또렷해진다. 민노당의 추락은 자주파와 평등파의 노선투쟁도 한 이유이지만, 좀더 큰 틀에서는 미숙한 진보정당의 전략에서 오는 것으로 봐야 한다. 서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이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피부에 와닿는 것은 많지 않았다. ‘종북문제’라는 인식차 뒤에 민생 문제에 부응하지 못한 진보정당의 책임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지하철 역에서 길을 잃거나 고래가 떼죽음을 당하는 사이 쥐띠 해 2008년이 밝았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심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진실 혹은 거짓’의 효력을 다투다가 이명박 정부에서는 ‘당당한 진실’이 됐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 노선을 슬쩍 차용한 ‘신자유주의 실용 고양이’는 쥐띠 해 친기업적 정책을 통해 서민의 삶을 더 쥐구멍으로 몰지 모른다.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은 “한-미 동맹, 준법 질서 확립, 노사관계 안정, 각종 규제 완화 등 모든 것이 한마디로 기업할 의지를 높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친기업가적으로, 노동자에게 더 가혹한 준법 질서를 요구한다. 진보정당의 둑이 더 튼튼해져야 하는 이유다.

민노당은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의 ‘해밀’을 새긴 떡을 썰며 새해를 맞았다.

손준현/편집선임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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