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18 19:13
수정 : 2007.12.1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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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호/남북관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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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지난 5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친애하는’으로 시작되는 친서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했다. 핵 불능화 이행을 평가하면서 완전하고 정확한 핵 신고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부시 행정부 내내 만연했던 냉전으로부터의 커다란 도약”이라고 치켜세웠다. 과연 그런가?
적어도 북한은 그렇게 보지 않는 듯하다. 뉴욕채널을 통해 나온 “미국이 약속을 지키는 한 우리도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북쪽의 반응은 공식 답변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생각이 담겨 있다. 한마디로 썰렁하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이 친서가 북한에만 주는 게 아니라며 다른 6자 회담 참가국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전임자인 클린턴 대통령의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좀스럽다.
대선은 오늘로 끝나지만 핵문제는 그렇지 않다. 10월3일 불능화 합의문 이래 6자 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6∼8일로 예고됐던 수석대표 비공식회담은 무산됐다. 현재로선 다음 회담 일정도 점칠 수가 없다. 12월 말 이후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격랑이 예고된다. 부시 친서로 이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친서’는 고육지책이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가 평양 방문에 앞서 서울에 왔을 때 공교롭게도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도 김정일 위원장 특사로 서울에 있었다. 김 특사는 불능화에 상응하는 미국 쪽의 조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힐 차관보가 서울에 올 때는 없었던 친서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그러나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이 말했듯이 친서의 핵심은 12월 말까지 완전하고도 정확한 핵신고를 하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폐기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돌파구로 추진됐던 종전선언을 위한 4자 정상회담은 실종됐다. 총련기관지 <조선신보>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3∼4자 정상회담은 부시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김 위원장의 공식 회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친서로 대신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12일 말했듯이 이는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모두 포기하기 전까지는 북한 정부와 폭넓은 관계개선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보기엔 ‘핵폐기 먼저’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6일 조찬 간담회에서 “현재 핵문제는 안정적 국면으로 가느냐, 삐걱거리는 굴곡을 겪느냐의 고비에 있다”고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삐걱거리는 굴곡이 예상된다.
북한 핵문제는 정권교체기에 터져나왔다. 과도기의 남북관계에 직격탄을 날리면서 갓 취임한 남쪽 정부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가 그랬다. 2월의 취임 직전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가 대북 특별사찰을 결의하자 북한은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5년 전 대통령 선거 1주일 전인 12월12일 북한 외무성은 대변인 담화를 내고 ‘핵동결 해제’를 선언했다. 심지어 노 대통령 취임식 전날 북한제 실크웜 미사일을 발사했고 취임식 다음날엔 영변 핵시설 재가동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 당선자는 12월30일 계룡대를 찾아 이렇게 말했다. “북한 핵문제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국민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정치하는 사람의 책임이고 국민의 책임이다.” 지금은 핵위기가 심화되던 그 때와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또다른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대통령 당선자라면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걸까?
강태호/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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