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11.15 18:19 수정 : 2007.11.15 18:19

손준현/선임편집기자

한겨레프리즘

검은 비닐봉지가 502동과 501동 사이를 날아간다. 나는 저 친구를 잘 안다. 바람 부는 날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까마귀처럼 나무에 걸터앉아 나를 조롱하거나, 개울에서 배를 내민 익사체로 떠 있기도 했다. 세속도시의 한 모퉁이를 무단으로 점거한 채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굴을 번들거릴 때, 섬뜩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너무 익숙해, 오히려 옛 동무 같기도 하다.

나는 배가 불룩하게 나온 그 친구의 손을 자주 잡는다. 주로 ‘마트’를 참칭하는 아파트 단지 안 가게에서 그 친구를 데려온다. 스낵 과자류와 맥주와 심심풀이 땅콩으로 배를 불린 그 친구는 내 걸음에 맞춰 앞뒤로, 좌우로 춤을 춘다. 우리 둘의 게걸스런 식탐이 공동보조를 맞춘다. 검은 비닐봉지의 블루스. 어떤 날은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지만, 뻔뻔스럽게, 아내의 손을 잡고 오기도 한다. 의혹의 시선으로 뱃속을 까뒤집으면 붕어빵이나 순대를 실토하곤 했다.

“봉투 필요하세요?” 일주일에 한번쯤 상품의 숲에서 산책한다. 세속도시의 산책길은 대형 할인점이다. 진열대 옆을 숲길을 지나듯 천천히 걷는다. 전람회의 그림처럼 상품과 상품을 구매하는 풍경이 하나씩 스쳐 간다. 단풍을 주워 책갈피에 꽂듯 물건을 쇼핑 카트에 담는다. 카트에 실린 상품이 계산대 위를 지날 때 계산원은 50원짜리 비닐봉투를 살 것인지 묻는다. 50원의 지급은 원래 재활용의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계산원과 소비자 사이의 의미 없는 음성신호일 뿐이다.

비닐봉지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최소한 계급은 있다. 50원을 받는 할인점의 비닐봉지는 소비사회의 정규군이다. 흰색과 노란색의 반투명 전투복에는 기업 로고가 위장 목적의 무늬처럼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검은 비닐봉지는 일용 노동자다. 쓰고 버려지는, 넘치고 넘치는 산업예비군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다 스러진 검은 작업복이며 상복이다. 펄럭이는 만장이다. 오늘도 소비사회의 맨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낮은 포복으로 아스팔트 위를 뒹군다. 산업사회 전반기에 딱딱하게 뭉쳤던 것들이 왜 이제 비닐처럼 얇고 가벼워졌을까. 어느 돌멩이의 외침 대신 어느 검은 비닐봉지의 외침이 들린다.

재생 비닐봉지처럼 삶도 재생될 수 있는가. 비 오는 날 길 모퉁이에서 검은 눈물 뚝뚝 흘리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삶이란 제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라며 검은 비닐봉투는 부스럭거렸다. 발코니 한편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채 내가 그를 잊고 있는 동안, 그는 캄캄한 뱃속에서 감자나 양파 싹을 키워낸다. 그 생명력은 눈물겹지만, 수확은 그의 것이 아니다. 자궁만 빌려준 대리모처럼 그의 공로는 무시된다. 그는 여전히 한줌 어둠일 뿐이다.

뱃속에 사소한 일상용품을 잔뜩 넣어 집으로 온 검은 비닐봉지에게 이제 마지막 임무가 기다리고 있다. 출근길이나 저녁쯤 소비도시의 설거지 역할까지 떠맡아야 한다. 변기가 제 속의 배설물을 일순 회오리처럼 쓸어버리듯, 음식 찌꺼기로 다시 배를 잔뜩 불린 비닐봉지는 제 속을 수거통에 일순 말끔하게 게워낸다. 속을 비운 봉지는 따로 다른 통에 담긴다. 아파트 경비원은 그 봉지들을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다시 담아 집단 처분한다.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간다. 502동과 501동 사이를 묵시록처럼, 종말론처럼 날아간다. 모차르트의 문 밖에 선 살리에르처럼 검은 가면 검은 망토를 휘날린다. 소비사회의 하부구조를 떠받치다 세속도시의 가장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돈다. 곧 땅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손준현/선임편집기자dust@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프리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