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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01 18:23 수정 : 2007.11.01 18:23

권복기/공동체팀장

한겨레프리즘

영어 교육 이야기에 이르면 국론이 아주 쉽게 모아진다. 다다익선. 영어 조기교육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는 물론이고 태아에게까지 영어를 들려줄 정도가 됐다.

영어는 ‘묻지마 교육’의 주요 과목이 된 지 오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일생 동안 쓰는 교육비 가운데 영어에 할당된 금액이 가장 많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따져 보자. 영어가 우리 생활에서 어느 정도 쓰이며, 각각의 직업마다 어떤 수준의 영어가 필요한지. 개인은 영어에 대한 투자에 걸맞게 수익을 올리고 있는지.

몇 해 전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였다. 동시통역사가 있다고 해서 부담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나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편했다. 아니 이런 방법도 있었네?

그때 얻은 깨달음. 굳이 모든 사람이 영어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 경우도 고급 영어 구사가 필요한 경우는 1년에 한두 차례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영어에 쏟아부은 노력을 돈으로 환산하면 필요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도 남는다.

우리 사회의 영어 사용 실태도 그렇다. 어느 조직이나 중요한 일에는 어학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정부나 기업이 그렇고 심지어 시민단체에서도 국제회의를 할 때 동시통역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수준의 영어가 필요한 직업은 극소수다.

국민 대부분에게 필요한 영어는 아주 낮은 수준이다. 외국에 여행 가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영어 교육에 목을 매는 것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진학과 취직에서 주요한 평가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신들이 가르쳐야 할 어학 교육의 몫을 입사 준비생에게 떠넘기는 현실을 바꾸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공적 영역인 대학과 공조직은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심지어 한의학이나 국문학처럼 영어와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학과의 입학을 영어가 크게 좌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국가고시나 공기업의 채용도 비슷하다. 사업장 대부분이 국내에 있는 어떤 공기업의 신입사원 토익 평균 점수가 900점을 넘었다고 한다. 2년 전쯤 만난 한 교대생은 임용고시에서 영어 성적에 따라 가점을 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학생은 초등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갔더니 교사들이 정서가 불안한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점을 준다면 도리어 심리 치료나 상담 과정을 이수한 이들에게 줘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한 명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교수는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할 대학생들이 외국어를 배우려고 1년씩 미국으로 연수를 오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는 미국인이 외국인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영어 구사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콘텐츠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진학과 취업 때 모든 이들에게 비슷한 수준의 영어 실력을 요구하는 것은 비효율의 극치라고도 했다.

온 국민을 영어 학습 광풍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지금이라도 사회 각 부문에서 영어에 두고 있는 가중치를 크게 낮춰야 한다. 지금처럼 온 국민이 영어 공부에 막대한 돈과 시간을 쏟아부을 까닭이, 다재다능한 아이들이 영어 실력이 모자라 전문가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전문가가 어디 있냐고? 전문 통역가와 번역가를 양성하면 된다. 동시통역대학원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로스쿨 못지않게 시급한 문제다. 온 국민이 영어에 가위눌려 영어 교육에 돈과 시간을 물 쓰듯이 하는 현실은 바꿔야 한다. 그래야 영어 교육의 국가적인 대차대조표에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권복기/공동체팀장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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