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16 17:58
수정 : 2007.10.1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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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경제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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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오랜만에 텔레비전 토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처음 출연했던 <문화방송>의 지난주 ‘100분 토론’이었다. 보는 동안 재밌었고, 끝나고는 허탈했다.
이 후보는 토론에서 그의 장·단점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의 지지자나 비판자가 가공한 ‘이명박’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내보이는 맨몸 그대로를 볼 수 있었다. 현재로선 다음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인 그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특유의 유연함과 능란한 임기응변으로 패널들의 질문을 받아넘겼다. 시종일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모든 사안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그의 장점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토론을 주도해 나가는 과단성도 돋보였다.
하지만 토론을 보고 난 뒤 이 후보가 어떻게 50%가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토론에서 드러난 이 후보의 철학·경제관·리더십 등은 실망스런 수준이었다. ‘경제 대통령’ ‘샐러리맨의 신화’ 등으로 치장된 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그는 솔직하지 못했다.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본인 스스로 위장 전입, 선거법 위반 등 위법한 사례들이 있었다”며 “법과 질서 준수의 기준을 힘없는 근로자나 서민에게만 너무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엉뚱한 동문서답으로 피해나갔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경제 대통령’이라고 보기에는 논리가 너무 부족했다. “에이비시(ABC)를 아는 사람이라면 7%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에 “법 질서만 제대로 확립돼도 1% 성장은 가능하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설득력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그의 이미지를 무색하게 했다.
논란을 빚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업이 아니고 꼭 해야 되는 사업”이라고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왜 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 운하 건설의 목적이 계속 바뀌는 게 아니냐는 지적에 물류, 내륙균형개발, 관광, 지구온난화 방지 등 다목적용이라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다목적용’ 해명이었다.
현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10만원권 화폐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가족끼리 다 올라가는 것이 되니까 피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 이미지로 현대 여성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게 여성단체의 주장이다.
가장 당황스런 것은 ‘정직’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이 후보는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이것이 바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정직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패널의 추궁에도 “거짓말인지 모르고 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응대했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이 후보의 이런 인식체계는 모든 사안에 대한 논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거짓말도 내 관점에서는 진실이 될 수 있고, 실체적 진실도 상대방만의 진실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후보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활자화된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 매체에 의해 형성돼 왔다. 활자에는 쓰는 사람의 주관과 정치적 의도가 스며 있다. 반면 텔레비전 등 영상 매체는 출연자의 표정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그대로 보여 준다.
이 후보는 이번 토론에서 화려한 치장 속에 가려 있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게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를 감싸고 있던 ‘비단옷’들이 한꺼풀씩 벗겨나가고 있다.
정석구/경제부문 선임기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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