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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8 17:39 수정 : 2007.06.28 21:38

권복기 공동체팀장

한겨레프리즘

1980년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대학입시제도는 본고사였습니다. 첫 월례고사를 치고 나니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의 이름이 학교 게시판에 나붙더군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친구들 가운데 이른바 대구의 강남 지역 출신이 많았습니다.

‘빨간’ 〈기본영어〉가 영어 교재의 전부인 줄 알았던 저와 달리 어떤 친구는 〈성문 기본영어〉를 다 떼고 〈성문 종합영어〉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석’이나 ‘해법’ 같은 책을 중학교 때 미리 공부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해 광주항쟁이 있었고, 2학기부터 과외가 금지되고 본고사가 폐지됐습니다. 그 조처에 담긴 ‘마법’은 놀라웠습니다. 2년이 지난 뒤 3학년이 되자 ‘성적 게시판’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 사는 친구들 이름이 부쩍 늘었습니다.

제 동기생들의 입시 성적표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고교평준화 전 ‘깡패 학교’로 이름난 학교에서 재수생까지 합해 30명 가까이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한 해에 한두 명 가량을 서울대에 보내던 학생수 600여 명의 지방 고등학교는 단숨에 입시 명문고가 됐습니다. 그런 탓에 저와 고교 동기생들은 대학생 때 모이기만 하면 전두환 정권에 대해 온갖 욕을 해댔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서울은 고사하고 대학도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는 말에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는 전두환 정권의 ‘마법’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는 후배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습니다. 정당성이 없는 정권은 민심을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대다수 가정이 고민하는 교육 문제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과외 금지와 내신과 학력고사를 통한 대입선발제도는 박정희 정권의 고교평준화에 이은 교육 정책의 또 다른 ‘진보’였습니다.

그 결과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서울 지역의 이른바 명문 대학의 캠퍼스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개천의 용’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를 거치면서 입시제도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쉽도록 바뀌었습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의 학력 수준이 높아졌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도 탓이라고 믿습니다. 제 경험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헌이 된 과외금지 조처를 다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학생들은 부모의 재력에 따라 불공정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할당제입니다. 26일 정부가 발표한 ‘기회균등 할당제’는 꼼수에 불과합니다. 지금 제도로도 9%까지는 정원 외 입학이 가능하지만 대학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정부는 수수방관했습니다. 대학에 돈을 좀 쥐여준다고 달라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지역·계층 할당제를 도입합시다. 대학들이 정원의 20% 이상을 농어촌 지역이나 차상위 계층 및 기초생활 수급권자 자녀들 가운데서 뽑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학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요? 정부는 예산이 있습니다. 교육 정의를 받아들이는 대학에 정부 예산을 우선 배정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인생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것을 꼽으라면 80년대의 입시제도를 들겠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군사독재정권이 만든 제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는 저 같은 ‘행운’을 만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전두환 정권의 교육 정책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권복기 공동체팀장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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