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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6 17:31 수정 : 2007.06.26 17:31

이길우/온라인 부국장

한겨레프리즘

그는 고교 시절 이미 팬클럽을 갖고 있던 ‘스타’였다. 노래와 개그로 익살을 뽐내며 학원가를 휘어잡았다. 어느 겨울 방학, 그는 자선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위문품을 사 인천시 부평의 나환자촌을 찾았다. 누구도 찾아가지 않던 관심의 사각지대였다. 한센병(나병)으로 손가락이 모두 문드러져 없어진 촌장이 악수를 청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촌장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학생은 진정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1980년대 말, 스스로 붙인 별명 ‘밥풀떼기’로 더 잘 알려진 김정식(48)씨는 청소년 시절 나환자촌장의 눈물을 보며 봉사의 삶을 다짐했다. 그는 그 시절 인기 최고의 개그맨이었다. 주말 개그프로그램에 ‘도시의 천사’ ‘동작 그만’이라는 코너를 기획하고, 각본도 쓰고, 출연했다.

“밥풀떼기는 없으면 아쉽고 먹어도 허기는 채울 수 없는 그런 존재죠.” 김씨는 ‘쉰옥수수’ 임하룡씨 등과 함께 세상의 허위의식과 허세를 건달의 몸짓으로 유쾌하게 고발했다. 김씨는 98년 방송계를 ‘훌쩍’ 떠났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방송이 너무 쉽고 우습게 느껴졌어요. 치매 걸린 어머니의 약값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송을 했고, 충분히 그만한 돈은 벌었어요. 허무한 웃음의 전도사보다는 진정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어요.”

그런 그가 최근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개그맨 출신의 목사가 된 셈이다. ‘밥풀떼기 목사’의 사연이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통통한 몸에 반바지·티셔츠 차림으로 껄껄 웃고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목석같이 살 수 없잖아요. 태양의 빛을 함께 나누고, 서로 안아주고, 배려하고, 감사하고, 감동이 왔을 때 울 줄 알아야죠.” 그는 방송계를 떠난 뒤 장애인에 대한 본격적인 봉사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봉사활동을 시간 날 때만 하면 취미생활이잖아요. 참된 봉사란 자기 희생 없이는 할 수 없고,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는 음지에 있는 장애인을 양지로 끌어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쌍방향 인터넷 방송을 한 것이다.

“장애가 죄입니까? 가족들이 숨기니까 사회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어요.” 장애인이 비장애인 사이에서 느끼는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사이버 공간뿐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 마비의 중증 장애인인 공미라(23)씨는 김 목사 덕분에 사회에 나왔다. 김 목사가 운영하던 ‘청소년 문화마을’의 도서관에 사서로 취직된 것이다. 김 목사는 공씨를 위해 건물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했다. 목발을 짚은 공씨는 스스로의 힘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폐쇄된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왔다. 지금은 병원의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는 공씨는 장애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김 목사는 또 전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팩시밀리 보내기 운동’을 펼쳤고, 자신이 출강하는 나사렛대학의 장애인들을 위해 오전에 비장애인들은 엘리베이터 타지 않기 운동도 펼쳤다.

핸들 커버가 벗겨진 주행거리 25만㎞의 지프차를 몰고 다니는 김 목사는 ‘떠돌이 까치 목사’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어렵고 힘든 장애인을 찾아가기 위해 복지 정책에 첨단 정보 시스템을 접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길 바란다”는 김 목사는 낡아 해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길우/온라인 부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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