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19 17:39
수정 : 2007.06.2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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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24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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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1. 최근 경찰의 안락사 무혐의 결정을 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한다. 인간은 존엄하여 신만이 그 생명을 거둘 수 있다는 견해도 있고, 격렬한 불치의 고통을 견디도록 강요할 수 있는 건 신뿐이며 어떤 세속적 권위도 존엄히 죽을 권리를 앗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인간의 존엄이란 어떤 존엄일까? 인구의 대부분이 자살을 죄악시하는 가톨릭 신자로 구성된 한 남미 나라에서 헌법재판소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리며 이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내놨다. “생명을 단지 신성한 어떤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 없으며, 그보다는 존엄한 삶의 조건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존엄성이란 선언적이고 신학적이고 지고지순한 천상에 속한 단어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세속적이고 비루한 인간 세상에 속한 단어임을 말하고 있다. 범접할 수 없는 밤 하늘의 별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손에 잡을 수 있는 욕망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살아서의 문제에서랴. 헌법은 모든 이에게 존엄과 가치가 있다고 밝히면서, 일상에서 그 존엄을 충족할 욕망의 리스트를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인간다운 생활의 권리,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보호,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 사회복지의 보장 ….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대한민국의 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과연 몇명의 존엄을 찾아낼까?
2. 석양 녘, ‘베트남 여성,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이 펄럭이는 도시 한켠의 육교 아래.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 한분이 작은 손수레를 끌고 간다. 동전 몇개와 바꿀 폐지를 모으려 70살 노구를 혹사시킨다. 삶의 황혼 녘. 충분히 고단한 일생이었지만, 손주에게 소시지 반찬이라도 먹이려면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집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을 손주의 또래쯤 될까. 10대 아이들 서넛이 이 건물 저 건물을 기웃거린다. 오늘 밤을 웅크리고 보낼 안전한 건물 계단을 찾는 중이다. 집 나온 지 여섯달. 부모도, 학교도, 그 누구도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야수처럼 먹잇감의 돈을 뺏거나 훔치거나 그냥 굶는다.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노숙은 비행이라 치부될 뿐이다. 아이들이 기웃거리던 건물 중 하나인 대형마트에선 어느 아이의 어머니처럼 홀로 가계를 꾸리는 여성도 일하고 있다. 착실하게 공부하는 아들만 바라보고 산다. 비싼 학원은 아니어도 한두 과목은 가르치고 싶다. 그러나 갑작스런 해고 통보. 비정규직은 성실히 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뒷골목 반지하방에서는 그처럼 직장을 잃고 막막한 삶을 국가공인 고리사채로 견디던 또다른 여성이 수면제 한움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 경찰차. 30대 중증장애인은 자신을 돌보던 유일한 손길이던 가난한 아버지마저 병으로 숨진 뒤 스스로 목맨 채 발견됐다. 이웃들은 수군거린다, 어차피 혼자서는 못 살았지. 죽음의 냄새를 담은 바람이 골목을 벗어나자, 할머니도 아이들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육교 난간에 ‘존엄 대신 돈’이라는 현수막만 펄럭거린다.
3. 그놈의 헌법은 법전 속에서 히죽인다. 잡범 하나를 체포한 형사가 묵비권을 일러주고는 이내 “불어, 새끼야!”라고 주먹을 내지르는 장면이 연상된다. 존엄성을 일러주기만 할 뿐 보장해주지는 않는 잡범 취급. 존엄성은 순간 천상의 그 무엇으로 증발해버린다. 탓할 게 그놈의 헌법뿐이랴. 인간 존엄성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나으리’들. 그놈의 ….
박용현/24시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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