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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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오르막길을 달렸다. 차가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차는 그의 오른다리를 으깼다. 그는 ‘드림’(꿈)이란 이름이 붙은 오토바이와 같이 내동댕이쳐졌다. 불 꺼진 병실에서 아버지는 손을 바르르 떨며 그의 발을 어루만졌다. “미안하구나. 수술하란다.” 그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흐느낌이 그를 더 무너뜨렸다. 딱딱한 수술대에서 깊은 잠을 자고 나니 오른 무릎 아래쪽이 사라졌다. 18살 늦가을이었다. 휠체어가 계단에 처음 툭 걸렸던 날, 그는 굴러 떨어져 모든 걸 끝낼 생각도 했다. “내가 너라면 자살하겠다”는 친구의 말이 할퀴고 간 뒤였다. 가짜 다리를 달았다. 100m 이상 걷기가 벅찼다. 운동을 잘했던 그는 체육시간마다 주번을 자청해 교실에 틀어박혔다. 대학에서도 하룻밤 자는 모임은 빠졌다. 다리를 분리하고 자는 모습을 저들이 편히 바라볼까? 그는 혼자 묻고 스스로 체념했다. “대합실 가는 게 제일 싫었죠. 날 구경하려고 앉아 있는 것 같아서.” 짜증나고 의미 없는 삶이었다. 꽁꽁 잠근 그의 마음에 자형이 죽비를 내리쳤다. “아픈 걸 밑천 삼아 동정 받으려 하느냐? 부모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려고?” 그는 “뭘 아느냐”며 대들었다. 자형은 낚시에 데리고 다니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자형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날 따라 철인 3종을 해볼래?” 코웃음을 쳤다. “걷기도 힘든데 …. 뭘 해?” 철인 3종 마니아였던 자형은 “하지도 않고 왜 포기하느냐”며 일단 대회를 구경시켰다. 그렇게 2년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결승선에 들어오며 하나같이 웃고 있는 거예요.” 그들을 붙잡았다. “힘들지 않아요?” 당연한 물음이었고, “즐거워요?” 그럴 리 없다고 여겼다. “힘들긴. 희열이 쫙 오는데.” 그는 강한 그들을 보며 한낮인데도 전율 탓에 몸이 다 떨렸다고 했다. 2004년 말. 6개월을 망설이다 수영장에 갔다. 잘린 다리를 발가벗고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한번만 버려보자고 했죠. 내 안에서 쓸데없이 꽉 움켜쥐고 있던 부끄러움과 두려움. 버리니까 할 수 있는 게 보이는 거예요.” 4개월 뒤 장애인 수영대회 50m에 나가 은메달을 땄다. 내친 김에 3㎞·5㎞·10㎞ 바다수영 대회에 참가해 세상과 만났다. 지난 3일 트라이애슬론 아시아선수권 동호회 부문에 나온 그는 한쪽 다리로 도약해 통영 앞바다로 다이빙까지 하며 들어갔다. 1.5㎞ 바닷길을 헤쳤다. 그러곤 젖은 다리에 14년 전 잘려나간 크기 만큼의 의족을 채웠다. 사이클 페달 위에서 왼발은 두 배의 힘으로 의족을 도왔다. 오르막은 또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그는 멈추지 않고 40㎞를 더 갔다. 지난해 그가 포기한 마지막 10㎞ 달리기. 그는 왼다리 경련으로 스무 차례나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피가 급격히 쏠리는 오른 다리는 두 번이나 의족을 풀었다 끼웠다. 그는 저만치서 기다리던 자형을 만나 절룩거리며 남은 600m를 지워갔다. 3시간55분49초. 포항에서 의학연구소 ‘영업맨’으로 뛰는 이준하(32)씨는 51.5㎞, 약 130리의 험한 길을 끝까지 완주했다. “마음이 가니 몸이 가더군요. 가시밭길인 듯하지만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그 길은 비단길로 변했죠. 오르막을 넘어야 내리막을 만나잖아요. 그럼 참고 또 가야죠. 저기서 결승점이 날 기쁘게 맞이하겠다며 기다리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물어요.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사냐고.” 결승선 통과하던 순간 그의 얼굴을 봤다. 몇 해 전 그가 좀체 이해하지 못했던 그 웃음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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