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경제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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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종합주가지수가 1700을 훌쩍 뛰어넘어 순항 중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대한민국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안 보인다. 시장 주도주의 명성은 어디 가고 주당 50만원대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9월 종합지수가 1300선일 때도 70만원에 가까웠던 삼성전자다. 환율 하락과 반도체값 하락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영향으로 올 1분기 실적이 저조한 데 이어 2분기 전망도 밝지 않다. 삼성은 반도체값 오르기만 바라고 있다. 하반기 들어 예상대로 반도체값이 회복되면 실적이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삼성전자의 앞날이 순탄할 것 같지는 않다. 삼성전자 문제는 그룹 전체가 부닥친 위기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최근 4~5년 성장세를 사실상 멈췄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등을 비롯한 상장기업 14곳의 매출액은 2002년 95조원에서 지난해 92조원으로 줄었다. 영업이익도 9조원선에서 8조원선으로 감소했다. 양과 질 모두 내리막이다. 올 들어서도 이런 추세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삼성은 어디에 문제가 있어 이렇게 내리막길로 들어섰을까. 삼성은 인재 제일주의를 경영의 핵심가치로 내세운다. 이건희 회장도 “인재를 천재화시켜”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핵심가치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8년 가까이 삼성전자에 다니다 얼마 전 사표를 쓴 전 삼성 직원은 “회사를 더 다니다가는 미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실적경쟁 속에서 뒤처진 동료들의 책상이 어느날 조용히 치워지는 것을 계속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밀려날 것이라는 압박감을 더는 견디지 못해 그만뒀다고 털어놓았다. 삼성 계열사 임원으로 있다가 다른 그룹으로 옮긴 이는 “월급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삶의 질은 세 배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10만명을 먹여살릴 1명의 천재’ 육성에만 매달리고 ‘10만명의 보통 인간’은 배려하지 않는 인재 제일주의는 오히려 다수의 인재가 회사를 떠나게 만든다. ‘보통 인간’은 사라지고 ‘천재’만 남은 회사는 미래가 없다. 치밀하기로 유명한 삼성의 관리체계도 조직의 활력을 저하시킨다. 유연한 조직과 개인의 창의성·자발성이 기업 발전의 동력이 된 시대에 구성원들을 옭아매는 ‘관리의 삼성’이란 명성은 이제 벗어던져야 할 구태일 뿐이다. 지난달 삼성물산의 1년차 직원이 ‘냄비 속의 개구리’라며 삼성의 조직문화를 강하게 비판하고 회사를 떠났다. 삼성의 치밀한 관리시스템이 관료주의로 변질돼 조직을 경직시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영권 편법 승계’나 ‘무노조 경영’도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논란은 겉으로는 법적 다툼이지만 실제로는 삼성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가늠자다. 3세인 이재용씨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려는 편법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착오적이고 기본적인 인권마저 무시하는 무노조 경영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상식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복잡한 법률 이론이나 경제 논리를 들이대며 강변할수록 삼성은 일류기업에서 더 멀어진다. 반도체값이 올라가고, 사업구조를 혁신하고, 첨단기술 개발로 국제경쟁력이 높아지면 지표상 실적은 일시적으로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된다. 삼성 위기의 본질은 재무상의 위기가 아니다. 삼성이 지향하는 핵심가치가 변질되고, 시대정신에 뒤처지고,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삼성의 내리막길은 의외로 가팔라질 수 있다. 정석구 /경제부문 선임기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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