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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우 온라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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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다섯 남매는 장롱을 열고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아버지의 뼛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주었다. “내가 죽으면 조장(독수리가 주검을 뜯어먹게 하는 티베트 전통 장례의식)을 하지 말고 화장을 해라. 뼛가루를 가지고 있다가 돈이 생기면 대륙 동쪽의 압록강에 가서 내 뼛가루를 뿌리거라. 그러면 언젠가는 흘러흘러 고향 앞바다에 도착할 것이다. 혹시 착한 한국인을 만나거든 사정을 이야기해라.”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박준의씨의 뼛가루를 앞에 놓고 다섯 남매는 한국에서 온 교수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박씨의 이야기를 들은 이는 신근호(63) 한-티베트문화연구원 원장. 1995년 당시 티베트 라싸에 있는 대학에 방문학자로 간 신 원장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티베트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한국 승려 세 사람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승려를 친형제처럼 돌보아 주었다는 한 조선족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수소문 끝에 라싸에 살고 있던 그 조선족을 찾긴 했으나 석 달 전 타계했고, 그의 3남2녀 자녀들은 생전 아버지로부터 들은 희미한 고향에 대한 기억을 신 원장에게 전했다. 그 아련한 기억은 “해안가, 사철 쌀밥을 먹을 수 있고, 집에서 나가면 바로 고기를 잡을 수 있고, 황도항이라던가 ….” 그 정도였다. 신 원장은 그 뒤 13년에 걸쳐 박씨의 고향을 찾는 데 온힘을 쏟아 마침내 94년 전 떠난 박씨의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오는 8일 박씨의 뼛가루를 고향에 묻는다. 박씨가 한반도를 떠난 것은 세 살 때인 1913년. 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했으나 곧 고아가 됐다. 아버지는 양조장 우물에 빠져 숨졌고, 어머니는 이리에게 물려 숨졌다. 박씨는 노무자, 목수일을 하다가 16살부터 7년 동안 만주 독립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조선족 여인과 결혼했으나 부인은 병들어 죽었고, 아들마저 잃었다. 마오쩌둥의 군대에 들어간 박씨는 네이멍구와 쓰촨성 등지를 떠돌다가 1959년 중국 인민군이 티베트에 진주할 당시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서 티베트 여인과 결혼한 박씨는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 당시 고향인 한국에서 큰누님이 보낸 편지 때문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공민권이 박탈돼 12년 동안 산속 움막에서 살아야 했다. 신 원장은 중국에서 귀국한 뒤 박씨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서해안을 수십차례 답사하며 박씨의 고향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충남 안면도 옆에 있는 황도를 찾아냈다. 지금은 민박집 마을로 유명한 황도를 박씨의 고향으로 인정한 이유는 지명이 일치하고, 압록강에 뼈를 뿌리면 서해안으로 흘러들고, 박씨의 큰누나가 시집간 수원 백씨 집안이 태안반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박씨는 조선족이었지만, 자녀들은 짱족이라 한국과 법적 연고관계가 없어 유골 봉환이 불가능했다. 신 원장은 중국 외교부, 티베트자치구정부 관련 부서 등 관계기관에 몇 해에 걸쳐 호소한 끝에 마침내 박씨 자녀들을 조선족으로 변경시켰고, 박씨 자녀들의 여권을 발급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황도 주민들을 설득해 공동묘지에 박씨의 뫼터를 마련했다. 지난 13년 동안 라싸의 어두운 장롱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박씨의 유골은 티베트 사원에서 천도재를 지낸 뒤 7일 한국에 아들의 손에 들려 도착한다. 표충사에서 천도재를 지낸 뒤 마침내 8일 바다가 보이는 황도의 땅에 정착한다. 한 노교수의 집념과 정성에 박씨는 비록 죽어서 뼛가루나마 꿈에 그리던 고향 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 박씨의 비문엔 이렇게 써 있다. “백년 만의 귀향. 티베트에서 고향을 찾아 묻히다.” 이길우 온라인 부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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