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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6 18:03 수정 : 2019.08.16 19:07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전철의 경로석 쪽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목청을 높인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혼내고 있는데, 젊은이가 아니라 어느 할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앞에 서 있는 더 나이 든 노인에게 자리를 비켜주라는 것이었다.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어이없어하면서 한마디 한다. “나도 나이가 칠십이유.” 할아버지는 또다시 역정을 낸다. “칠십이든 팔십이든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자리를 양보해야지!”

지하철 탑승자 가운데 고령자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의 고령자 비율보다 약간 더 높다. 노인들은 활동이 많지 않아 교통의 수요가 적고, 신체적인 제약으로 지하철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아예 거동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탑승자 비율이 그렇게 높은 것은 무료이기 때문이리라. 집은 답답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는 노인들에게 지하철은 고마운 공간이다. 익명성이 보장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다. 어르신들에게 전철은 말하자면 ‘이동식 쉼터’다. 노인들이 집 밖에서 머물 곳이 그렇게도 부족한가.

하드웨어는 꾸준하게 공급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로당인데, 지금 전국에 6만6천곳 정도가 운영되고 있다. 노인 인구 700만명 시대에 많이 부족한 규모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장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로당 이용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젊은’ 노인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경로당의 고령화, 전국 어디나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경로당은 다른 시설과 달리 상주 직원이 없이 이용자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텃세’를 부리면 새로운 사람들이 섞여들기 어렵다. 그 권력은 나이를 기준으로도 작동해서, 이용자들 사이에 위계서열이 생긴다. 그래서 70대 노인도 경로당에서는 막둥이 취급을 받으며 ‘어르신’들을 모셔야 한다. 편안하게 쉬러 갔는데 ‘형들’이 허드렛일을 떠넘겨서 발길을 끊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화투 등으로 소일하는 분위기, 노래교실이나 웃음체조처럼 판에 박힌 프로그램이 싫어서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경로석은 모자라고, 경로당은 한산하다. 두 현상은 맞물려 있다. 노인들이 동네에서 친구를 맺고 즐거운 일상을 꾸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만남과 어울림은 어떻게 가능할까. 몇해 전부터 ‘개방형 경로당’이라는 개념으로 지역사회와의 접점이 다양하게 모색되고 있다. 여러 연령대의 주민들이 교류하는 사랑방으로 변신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집 아이들이 경로당에 와서 전래 놀이를 배우고 동네 텃밭에 나가서 함께 작물을 가꾼다. 고등학생들이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례도 있다.

머지않아 노년층으로 접어드는 베이비붐 세대가 꾸려갈 경로당은 어떤 모습일까. 윗세대에 비해 학력도 높고 자아실현의 욕망도 강한 그들은 ‘뒷방 늙은이’로 여겨지기를 거부한다. 그 에너지가 꼰대질이나 허세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발현되면 좋겠다.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노년, 경로당은 그 거점이 될 수 있다.

경로(敬老). 노인을 공경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노인들끼리만 모여 있는 곳에서는 경로의 주체가 애매하다. 모두 대접만 받고 싶어 하니 관계가 경직되어 버린다. 서로의 원기를 북돋는 가운데 그동안 집과 일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 커뮤니티가 절실하다. 어르신들의 생애 경험이 공동의 소프트웨어로 축적되고 세대를 넘어서 문화의 발효가 일어나는 경로당을 상상해본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인 늙음을 경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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