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다 같이 깔깔깔, 울 일인데 일단 웃는다. 웃음 끝이 쓰다. 아이들에게 한탄 겸 질문을 던졌다. 여성들은 신체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왜 상대의 억울함을 이해시키는 임무까지 맡아야 하는지 우리 생각해보자고. 한 여자 대학생도 고민을 터놓는다. 생애 최초로 커트머리를 했다. 세상 가뿐했다. 샴푸도 절약되고 외출 준비 시간도 단축됐다. 한 남자 선배가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알아보길래, 그냥 호기심에 잘라봤다고 근데 이 편한 걸 그동안 남자들만 했느냐고 심상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선배는 누가 언제 머리 못 자르게 했냐고 받아쳤다. 안부에서 출발한 대화가 서먹해졌다. 그 일이 맘에 걸린다며, 여자 대학생은 남자들과 불편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을 물었다. 글 잘 쓰는 법처럼 답 없는 질문이다. “머리 길이가 세상을 활보하는 여성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남자에게 10분 안에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격체 이전에 관상용으로 취급받는 건 여성 공통의 사회적 경험이다. 그리고 대화에 불편함은 기본값이다. 생각의 결을 맞추는 일은 통증을 수반한다. 그보다 나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남자 선배도 이 일로 뒤척였을까. 주변 사람에게 여자 후배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더니’ 예민해져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대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을까.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엔 이런 일상의 말 한마디나 에피소드 하나를 두고 그 상황을 복기하고, 반성하고, 모색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드물다. 목마른 자가 샘 파는 이치 같다.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결혼부터 화장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훈련 덕분일 것이다. 인류를 둘로 나눠본다. 살면서 사사건건 자기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일 거다.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 나도 그랬다. 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혹독한 지적 정서적 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너무 오래 전담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 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제 몸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다.
칼럼 |
[삶의 창]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 / 은유 |
작가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다 같이 깔깔깔, 울 일인데 일단 웃는다. 웃음 끝이 쓰다. 아이들에게 한탄 겸 질문을 던졌다. 여성들은 신체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왜 상대의 억울함을 이해시키는 임무까지 맡아야 하는지 우리 생각해보자고. 한 여자 대학생도 고민을 터놓는다. 생애 최초로 커트머리를 했다. 세상 가뿐했다. 샴푸도 절약되고 외출 준비 시간도 단축됐다. 한 남자 선배가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알아보길래, 그냥 호기심에 잘라봤다고 근데 이 편한 걸 그동안 남자들만 했느냐고 심상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선배는 누가 언제 머리 못 자르게 했냐고 받아쳤다. 안부에서 출발한 대화가 서먹해졌다. 그 일이 맘에 걸린다며, 여자 대학생은 남자들과 불편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을 물었다. 글 잘 쓰는 법처럼 답 없는 질문이다. “머리 길이가 세상을 활보하는 여성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남자에게 10분 안에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격체 이전에 관상용으로 취급받는 건 여성 공통의 사회적 경험이다. 그리고 대화에 불편함은 기본값이다. 생각의 결을 맞추는 일은 통증을 수반한다. 그보다 나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남자 선배도 이 일로 뒤척였을까. 주변 사람에게 여자 후배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더니’ 예민해져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대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을까.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엔 이런 일상의 말 한마디나 에피소드 하나를 두고 그 상황을 복기하고, 반성하고, 모색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드물다. 목마른 자가 샘 파는 이치 같다.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결혼부터 화장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훈련 덕분일 것이다. 인류를 둘로 나눠본다. 살면서 사사건건 자기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일 거다.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 나도 그랬다. 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혹독한 지적 정서적 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너무 오래 전담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 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제 몸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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